일러스트=전희성 기자 lenny80@hankyung.com
일러스트=전희성 기자 lenny80@hankyung.com
지난해 6월 모나코 수도 몬테카를로. 굴지의 기업인들이 몰려들었다. 모나코의 명물인 자동차 경주 ‘포뮬러원(F1)’을 보기 위해서도, 고급 카지노에서 유흥을 즐기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세계 최고 권위의 ‘언스트앤영 최우수기업가상(賞)’의 왕관이 누구에게 돌아갈지 직접 보기 위해서였다.

봉투가 열리고 수상자가 발표된 순간, 객석에선 박수 대신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사회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은 소문으로 듣던 실리콘밸리의 벤처 기업가도, 아시아의 재벌도 아니었다. 이날 영예를 안은 주인공은 아프리카에서 ‘검은 은행혁명’을 일으키고 있는 기업가, 제임스 므왕기 케냐 에쿼티뱅크 최고경영자(CEO)였다.

가디언, BBC 등 주요 외신들은 그의 이야기를 앞다퉈 보도하며 “므왕기의 승리는 케냐, 은행업, 아프리카만의 승리가 아니라 전 세계 흑인 기업인들에게 울리는 승전보”라고 했다. 므왕기가 대부분의 흑인 재벌처럼 왕족의 후예도, 부모에게 부(富)를 물려받은 운 좋은 남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를 위한 금융 ‘역발상’


므왕기는 당시 수상소감에서 “나는 금융 서비스가 아프리카 땅을 보다 공정한 사회로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며 “아직 인구의 94%가 은행 서비스를 누리지 못해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므왕기는 1993년 파산 위기에 있던 에쿼티뱅크에 합류, 10년 만에 아프리카 최고의 은행으로 만들었다. 에쿼티뱅크의 케냐 시장 점유율은 꼴찌에서 1등으로 올랐고, 고객 수는 2000여명에서 800만여명이 됐다. 2006년 나이로비 증시에 상장해 지금까지 900% 이상 성장했다.

아프리카에 진출한 그 어떤 글로벌 은행도 시도하지 못했던 소액예금, 소액대출은 므왕기의 모험이자 가장 큰 무기였다. 케냐에서는 수십년 동안 바클레이즈와 스탠다드차타드 등 다국적 은행들이 주로 중산층 이상의 계층을 대상으로 은행 영업을 해왔다. 므왕기는 ‘가난한 사람들을 고객으로 삼는다’며 기존의 틀을 깬 역발상을 내놨다.

많은 사람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아프리카 은행업계의 채무 불이행 비율이 평균 15%인 데 비해 이 은행은 60만여건의 대출 중 채무 불이행 비율이 3% 미만에 불과하다. 현재 케냐에서 가장 순익을 많이 내는 은행이기도 하다. 므왕기는 2008년에는 방글라데시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무함마드 유누스와 공동으로 인터내셔널 마이크로파이낸스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홀어머니와 7남매의 ‘서바이벌’

므왕기는 아프리카의 관문인 케냐의 작은 마을 애버데어에서 태어났다. 애버데어는 ‘케냐의 심장’으로 불린다. 스와힐리어(語)로 타조라는 뜻의 나라이름 ‘케냐’가 탄생한 케냐산 옆에 자리하고 있고, 1950년대 영국으로부터의 식민지 독립을 외친 마우마우 봉기의 무대가 된 곳이다.

므왕기는 세 살 무렵 아버지를 잃었다. 마우마우의 일원으로 케냐 독립을 외치다 희생된 것. 7남매 중 여섯째였던 그의 어린 시절은 잔혹했다. 홀로된 어머니, 형제들과 함께 생업에 뛰어들었다. 밭을 갈고, 가축을 기르고, 석탄을 실어나르고, 과일을 파는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고된 노동을 하면서도 그가 놓지 않은 것이 있다. 공부다. 어머니 그레이스 와이리무는 “아무리 가난해도 7남매를 모두 최고의 교육을 받도록 하겠다”는 보기 드문 신념의 소유자였다. 동네 사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도 어머니는 7남매를 모두 교육시켰다.

므왕기는 “어머니는 손자와 손녀 4명까지 모두 미국 아이비리그에 보낼 정도로 교육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고 회상했다. 또 “어머니로부터 남들이 안된다고 할 때 소신을 지키는 법, 희망이 없어 보이는 것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법을 배웠다”고 말한다.

○“5파운드 이하도 빌려드려요”

어머니의 지원에 힘입어 므왕기는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중학교 때부터 장학생으로 공부하며 나이로비대 경제학과를 마쳤다. 스물여덟 살이 되던 해 그는 작은 은행의 회계업무를 맡아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93년 에쿼티뱅크의 피터 뭉가 회장이 그에게 함께 일할 것을 제안했다. 당시 에쿼티뱅크는 해마다 적자를 내 누적적자가 35만달러에 달했다.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기는커녕 당장 문을 닫을 지경이었다. 므왕기는 눈을 빛내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최악의 순간에 우리 7남매를 키워낸 어머니처럼, 나에게도 기회가 왔다. 완전히 뒤집어 보자”고.

쉽진 않았다. 다른 은행과 똑같이 했다간 한 달도 못 버틸 것 같았다. 므왕기는 은행 문도 밟아보지 못한 경비원, 영세농, 토마토 판매원 등을 파고 들었다.

기존 은행들은 계좌를 열기 전 월급명세서와 전기세 납입 고지서 등 서류를 요구하고, 상당한 액수의 잔액을 넣어야 하는 등 복잡했지만 에쿼티뱅크는 달랐다. 오직 신분증만 요구했다. 한 번도 계좌를 가져보지 못한 사람들이 몰려왔다. 5파운드 이하로 빌려주고, 몇 달에 나눠 갚을 수 있게 하는 소액대출이 특히 인기를 끌었다. 결혼 침대를 담보로 맡기기도 했고, 계좌주인을 묶어서 공동체가 관리하는 ‘사회적 담보’를 통해 채무 불이행 비율을 낮췄다. 아프리카 사회에서는 어느 누구도 공동체 사회에서 추방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이용한 전략이었다. 그는 “열 살 이전부터 먹고 살기 위해 물건을 사고 팔고, 돈을 관리해본 경험 때문에 진짜 아프리카 사람들이 필요한 게 뭔지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모바일 뱅킹으로 또 한번 혁신


그가 에쿼티뱅크에서 가장 처음 한 일은 직원 교육이었다. 회사의 목표와 금융의 역할을 가르치고, 모두에게 월급의 25%를 투자해 회사의 주식을 사도록 했다. 서서히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침 2000년대 들어 유럽연합(EU)으로부터 컴퓨터 시스템을 지원받았다. 송금 업무에 걸리는 시간은 30분에서 5분으로 단축됐고, 긴 줄은 사라졌다. 2004년에는 국제금융센터로부터 160만달러의 펀딩과 1000만달러의 민간투자금을 끌어모았다. 2006년에는 나이로비 증시에 상장했다. 1993년 연 5만8000달러의 적자를 냈던 은행이 2011년 1억4000만달러의 순익을 내는 아프리카의 ‘대표 은행’이 된 것이다.

혁신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에쿼티뱅크는 세계 최초의 순수 모바일 뱅킹 계좌를 제공하는 케냐 에쿼티를 세워 또 한번의 성공신화를 썼다. 인프라가 부족하고 소액결제가 많은 아프리카에서는 그만큼 이동통신과 모바일 결제에 대한 수요가 많았던 것. 그는 “아프리카는 기존 통신망이 없기 때문에 차세대 기술을 받아들이기에 유리하다”며 “싼 가격으로 최신 기술을 채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므왕기는 새벽 3시에 일어나 1시간반 동안 러닝머신 위에서 자신을 단련하며 경제경영 서적과 자서전 등을 주로 읽는다. 그의 롤모델은 누굴까. “넬슨 만델라와 잭 웰치, 그리고 빌 게이츠입니다. 이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작은 변화를 추구했고, 그 결과 사람들이 조금 더 나은 삶을 살도록 세상을 바꿨기 때문이죠.”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