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키 오사무 스즈키 회장, '착실하게, 그리고 천천히'…日 경차시장 부동의 1위 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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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속의 밤은 내가 줍는다"…위기 극복 조타수로 경영 복귀
해답은 현장에 있다…고도성장 끝난 뒤 판매급감 대응
경트럭 끌고 다니던 직원 보며 박스카 알토 만들어 대박
강소기업 비결은 '빚없는 경영'…원가·이익 '두 개의 주머니' 구분
무차입 경영으로 난관 극복…순차적 설비 투자로 리스크 관리
해답은 현장에 있다…고도성장 끝난 뒤 판매급감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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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기업 비결은 '빚없는 경영'…원가·이익 '두 개의 주머니' 구분
무차입 경영으로 난관 극복…순차적 설비 투자로 리스크 관리
2008년 12월10일 일본 경차업체인 스즈키의 창업가문 출신인 스즈키 오사무 회장이 경영일선에 복귀했다. 20여년간 회사 경영을 책임지다가 2000년 회장에서 물러난 뒤 다시 등장한 것이다. 스즈키 회장은 복귀선언을 하며 “남에게 불 속의 밤을 줍게 하기보다는 내가 먼저 줍겠다”며 “1~2년 안에 경기가 좋아질 상황은 아니기 때문에 경기가 좋아질 때까지는 싫어도 회사 경영을 책임질 것”이라고 말했다.
스즈키 회장은 특유의 리더십으로 회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경영자다. 그는 1978년 첫 사장 취임 당시 3000억엔에 불과했던 그룹 매출이 2007년 3조5000억엔으로 늘어나는 데 기초를 다졌다. 스즈키는 일본 경차 시장 부문에서 30년 넘게 1위를 달리고 있다. 스즈키 회장이 복귀한 뒤 이 회사는 세계 1위 자동차 업체인 도요타도 적자로 돌아서는 상황에서도 흑자를 내는 등 승승장구하고 있다.
◆현장에서 얻은 아이디어로 ‘대박’
1930년 기후현의 게로라는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스즈키 회장은 도쿄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1958년 스즈키에 입사했다. 스즈키 조 당시 사장의 데릴 사위였다. 입사 후 3개월간은 함께 입사한 공채 직원들과 공장실습을 했다. 당시 스즈키는 오토바이를 생산하는 기업이었다. 현장에서 일하면서 공장 설비와 시스템이 형편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좁은 공장에는 안 쓰는 부품과 반쯤 조립된 제품이 쌓여 있었고, 조립라인을 자동으로 움직일 수 없어 직원들이 일일이 옮겨가며 조립했다.
하지만 실습 후 본사 기획부에 와보니 현장과 한참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산량은커녕 공장 상황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는 현장 근무를 자청했다. 부품을 보관할 장소도 없던 공장을 정비하기 위해 납품 트럭을 댈 수 있는 부지를 마련하는 등 현장 개선에 힘썼다.
착실히 경력을 밟아가던 스즈키 오사무에게 1977년 위기가 찾아왔다. 그해 6월 2대 사장을 맡았던 장인이, 10월에는 창업자가, 11월에는 현직 사장이 모두 건강 악화로 물러나면서 데릴 사위인 그가 회사를 책임져야 했다. 더구나 1960년대 급성장하던 경차 시장은 일본 경제의 고도 성장기가 끝나가던 1970년대 들어 급격히 둔화하기 시작했다. 1970년 경차 판매 대수는 125만대로 신차 판매량의 30%를 차지했지만, 5년 뒤엔 58만대로 뚝 떨어졌다. 자동차 시장은 성장했지만 돈을 번 사람들이 경차보다는 큰 차를 선호하면서 경차 시장이 13%로 줄어든 것이다. 시장에선 ‘경차 시대가 끝났다’는 얘기까지 흘러나왔다.
스즈키 오사무는 답답한 마음에 예전에 일했던 하마마쓰의 교외에 있던 주물 공장을 찾았다. 그는 경트럭을 타고 다니는 직원들을 발견했다. 직원들은 평일에는 출퇴근용으로 쓸 수 있고 휴일에는 채소 운반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경트럭을 많이 탄다고 했다. 집에서 농사를 짓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승용차를 선호하던 고객들이 실용적인 상용차를 좋아하기 시작했다는 직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소비자의 니즈라는 말이 생소한 때였지만, 바로 시장의 요구를 읽었던 순간”이라고 회상했다.
이때 개발된 차량이 박스카 ‘알토’다. 알토를 생산원가 절감으로 다른 경차보다 40% 이상 저렴한 대당 35만엔의 가격으로 1979년 출시했다. 첫 달 8400대, 두 달째는 1만대가 넘게 팔렸다. 반짝 인기가 아니었다. 30년이 지난 지금, 다섯 번의 리뉴얼을 거친 알토는 500만대에 가까운 누적 판매량으로 스즈키의 대표 상품 지위를 굳히고 있다.
◆보수적인 투자로 위기 극복
스즈키 회장이 경영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착실한 성장’이다. 스즈키는 지난 30년간 매출 기준으로 10배 이상 성장했다. 특히 매출이 2조엔에서 3조엔으로 늘어날 때까진 4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스즈키 회장은 회사 덩치와 함께 실력이 막강해지지 않으면 위태롭다고 강조했다. 그는 “어린 시절 산골에 눈이 쌓이면 삼나무는 쪼개지곤 했지만, 대나무는 마디가 있어 휘어지긴 해도 부러지지 않았다”며 “한 번에 급성장하지 않고 연간 수백억엔씩 꾸준히 성장한다면 마디가 생겨 가혹한 위기에도 견딜 수 있다”고 말했다.
스즈키는 이런 신념아래 ‘빚 없는 경영’을 하고 있다. 현금보유량과 부채 비율이 거의 같은 실질적인 무(無)차입 경영을 진행 중이다. 스즈키 회장은 무차입 경영을 강조할 때 ‘두 개의 주머니’란 얘기를 언급하곤 한다. 아침마다 한 청과물 가게 주인은 시장에서 채소와 과일을 사와 손님들에게 팔았는데, 이때 두 개의 주머니를 단 앞치마를 사용했다. 5만엔어치 과일을 사왔다면 5만엔어치 팔 때까지는 오른쪽 주머니에 돈을 넣고, 이후부터 왼쪽 주머니에 돈을 넣었다. 원가와 이익을 구분해 보관하는 것이다.
스즈키 회장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주머니에 가진 돈 전부를 넣고, 원가도 자기가 번 돈으로 착각해 문제가 생기고, 결국 사업이 망하는 것”이라며 “두 개의 주머니를 잊지말라”고 임직원들에게 늘 강조한다.
투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1980년대 초 2사이클 엔진으로 자동차를 만들던 스즈키는 배기가스 규제에 대응하기 위해 4사이클 엔진을 개발해야 했다. 4사이클 엔진은 구성이 복잡해 생산하려면 보다 정밀한 설비가 필요했다. 문제는 이 설비가 매우 고가였다는 것이다. 스즈키 회장은 무리하지 않았다. 수입 내에서 기계를 구입하고 설비를 교체해나갔다.
마침 엔진의 생산설비는 차량 조립공장을 새로 지을 때처럼 한번에 목돈을 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필요한 설비를 구입하고 기존의 구형 설비들과 조합하면 그런대로 공장을 운영할 수 있었다. 스즈키 회장은 매달 들어오는 이익을 계산해 꾸준히 설비투자하는 방식으로 2년 만에 2사이클 설비를 4사이클 설비로 완전히 교체했다.
꼭 필요한 투자만 하는 방식은 자동차업계의 후발 주자인 스즈키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강소(强小)기업’으로 변모하는 데 도움이 됐다. 자동차업계 설비투자는 불황 때는 발목을 잡는 장애물이 되기 때문이다. 덩치가 큰 기업들은 한파에 속수무책이지만, 스즈키는 날렵하고 즉각적으로 대응했다. 스즈키는 오토바이 설비에서 경차를 만들고, 경차 라인에서 소형차를 만드는 식으로 최소한의 설비투자를 유지했다. 이 때문에 언제든 상황에 따라 신속하고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스즈키의 연간 매출은 3조엔 이상이지만 스즈키 회장은 여전히 중소기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매출 3조엔 중 실제로 창출한 부가가치는 유리, 타이어, 배터리 등 부품을 제외한 3000억~5000억엔 정도”라며 “우리 회사는 대기업이 아니라 중소기업”이라고 말한다. “죽을 때까지 평생 현역으로 달릴 것”이라는 말도 강조한다. 언젠가는 젊은 세대에게 회사를 물려주겠지만, 회사가 완전히 위기를 극복할 때까지는 경영 조타수로 남겠다는 다짐이다.
강영연 기자 yykang@hankyung.com
스즈키 회장은 특유의 리더십으로 회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경영자다. 그는 1978년 첫 사장 취임 당시 3000억엔에 불과했던 그룹 매출이 2007년 3조5000억엔으로 늘어나는 데 기초를 다졌다. 스즈키는 일본 경차 시장 부문에서 30년 넘게 1위를 달리고 있다. 스즈키 회장이 복귀한 뒤 이 회사는 세계 1위 자동차 업체인 도요타도 적자로 돌아서는 상황에서도 흑자를 내는 등 승승장구하고 있다.
◆현장에서 얻은 아이디어로 ‘대박’
1930년 기후현의 게로라는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스즈키 회장은 도쿄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1958년 스즈키에 입사했다. 스즈키 조 당시 사장의 데릴 사위였다. 입사 후 3개월간은 함께 입사한 공채 직원들과 공장실습을 했다. 당시 스즈키는 오토바이를 생산하는 기업이었다. 현장에서 일하면서 공장 설비와 시스템이 형편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좁은 공장에는 안 쓰는 부품과 반쯤 조립된 제품이 쌓여 있었고, 조립라인을 자동으로 움직일 수 없어 직원들이 일일이 옮겨가며 조립했다.
하지만 실습 후 본사 기획부에 와보니 현장과 한참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산량은커녕 공장 상황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는 현장 근무를 자청했다. 부품을 보관할 장소도 없던 공장을 정비하기 위해 납품 트럭을 댈 수 있는 부지를 마련하는 등 현장 개선에 힘썼다.
착실히 경력을 밟아가던 스즈키 오사무에게 1977년 위기가 찾아왔다. 그해 6월 2대 사장을 맡았던 장인이, 10월에는 창업자가, 11월에는 현직 사장이 모두 건강 악화로 물러나면서 데릴 사위인 그가 회사를 책임져야 했다. 더구나 1960년대 급성장하던 경차 시장은 일본 경제의 고도 성장기가 끝나가던 1970년대 들어 급격히 둔화하기 시작했다. 1970년 경차 판매 대수는 125만대로 신차 판매량의 30%를 차지했지만, 5년 뒤엔 58만대로 뚝 떨어졌다. 자동차 시장은 성장했지만 돈을 번 사람들이 경차보다는 큰 차를 선호하면서 경차 시장이 13%로 줄어든 것이다. 시장에선 ‘경차 시대가 끝났다’는 얘기까지 흘러나왔다.
스즈키 오사무는 답답한 마음에 예전에 일했던 하마마쓰의 교외에 있던 주물 공장을 찾았다. 그는 경트럭을 타고 다니는 직원들을 발견했다. 직원들은 평일에는 출퇴근용으로 쓸 수 있고 휴일에는 채소 운반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경트럭을 많이 탄다고 했다. 집에서 농사를 짓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승용차를 선호하던 고객들이 실용적인 상용차를 좋아하기 시작했다는 직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소비자의 니즈라는 말이 생소한 때였지만, 바로 시장의 요구를 읽었던 순간”이라고 회상했다.
이때 개발된 차량이 박스카 ‘알토’다. 알토를 생산원가 절감으로 다른 경차보다 40% 이상 저렴한 대당 35만엔의 가격으로 1979년 출시했다. 첫 달 8400대, 두 달째는 1만대가 넘게 팔렸다. 반짝 인기가 아니었다. 30년이 지난 지금, 다섯 번의 리뉴얼을 거친 알토는 500만대에 가까운 누적 판매량으로 스즈키의 대표 상품 지위를 굳히고 있다.
◆보수적인 투자로 위기 극복
스즈키 회장이 경영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착실한 성장’이다. 스즈키는 지난 30년간 매출 기준으로 10배 이상 성장했다. 특히 매출이 2조엔에서 3조엔으로 늘어날 때까진 4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스즈키 회장은 회사 덩치와 함께 실력이 막강해지지 않으면 위태롭다고 강조했다. 그는 “어린 시절 산골에 눈이 쌓이면 삼나무는 쪼개지곤 했지만, 대나무는 마디가 있어 휘어지긴 해도 부러지지 않았다”며 “한 번에 급성장하지 않고 연간 수백억엔씩 꾸준히 성장한다면 마디가 생겨 가혹한 위기에도 견딜 수 있다”고 말했다.
스즈키는 이런 신념아래 ‘빚 없는 경영’을 하고 있다. 현금보유량과 부채 비율이 거의 같은 실질적인 무(無)차입 경영을 진행 중이다. 스즈키 회장은 무차입 경영을 강조할 때 ‘두 개의 주머니’란 얘기를 언급하곤 한다. 아침마다 한 청과물 가게 주인은 시장에서 채소와 과일을 사와 손님들에게 팔았는데, 이때 두 개의 주머니를 단 앞치마를 사용했다. 5만엔어치 과일을 사왔다면 5만엔어치 팔 때까지는 오른쪽 주머니에 돈을 넣고, 이후부터 왼쪽 주머니에 돈을 넣었다. 원가와 이익을 구분해 보관하는 것이다.
스즈키 회장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주머니에 가진 돈 전부를 넣고, 원가도 자기가 번 돈으로 착각해 문제가 생기고, 결국 사업이 망하는 것”이라며 “두 개의 주머니를 잊지말라”고 임직원들에게 늘 강조한다.
투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1980년대 초 2사이클 엔진으로 자동차를 만들던 스즈키는 배기가스 규제에 대응하기 위해 4사이클 엔진을 개발해야 했다. 4사이클 엔진은 구성이 복잡해 생산하려면 보다 정밀한 설비가 필요했다. 문제는 이 설비가 매우 고가였다는 것이다. 스즈키 회장은 무리하지 않았다. 수입 내에서 기계를 구입하고 설비를 교체해나갔다.
마침 엔진의 생산설비는 차량 조립공장을 새로 지을 때처럼 한번에 목돈을 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필요한 설비를 구입하고 기존의 구형 설비들과 조합하면 그런대로 공장을 운영할 수 있었다. 스즈키 회장은 매달 들어오는 이익을 계산해 꾸준히 설비투자하는 방식으로 2년 만에 2사이클 설비를 4사이클 설비로 완전히 교체했다.
꼭 필요한 투자만 하는 방식은 자동차업계의 후발 주자인 스즈키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강소(强小)기업’으로 변모하는 데 도움이 됐다. 자동차업계 설비투자는 불황 때는 발목을 잡는 장애물이 되기 때문이다. 덩치가 큰 기업들은 한파에 속수무책이지만, 스즈키는 날렵하고 즉각적으로 대응했다. 스즈키는 오토바이 설비에서 경차를 만들고, 경차 라인에서 소형차를 만드는 식으로 최소한의 설비투자를 유지했다. 이 때문에 언제든 상황에 따라 신속하고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스즈키의 연간 매출은 3조엔 이상이지만 스즈키 회장은 여전히 중소기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매출 3조엔 중 실제로 창출한 부가가치는 유리, 타이어, 배터리 등 부품을 제외한 3000억~5000억엔 정도”라며 “우리 회사는 대기업이 아니라 중소기업”이라고 말한다. “죽을 때까지 평생 현역으로 달릴 것”이라는 말도 강조한다. 언젠가는 젊은 세대에게 회사를 물려주겠지만, 회사가 완전히 위기를 극복할 때까지는 경영 조타수로 남겠다는 다짐이다.
강영연 기자 yy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