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아 출신 미국화가 진 마이어슨이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정석범 기자
입양아 출신 미국화가 진 마이어슨이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정석범 기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모든 게 다 뒤틀렸다. 마치 압착기로 눌러 뭔가를 찌그러뜨린 것 같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건축물이나 가로수 같은 구체적인 형상의 파편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지만 전체적인 인상은 영락없이 20세기를 풍미했던 추상미술이다.

입양아 출신의 미국 작가 진 마이어슨의 개인전 ‘끝없는 경계(Endless Frontier)’가 오는 9월28일부터 10월6일까지 서울 사간동 학고재갤러리에서 열린다.

작가는 인터넷, TV, 잡지 등 미디어에서 채취한 다양한 이미지를 컴퓨터 작업을 통해 왜곡한 뒤 그 위에 다시 색을 칠하고 늘이기와 줄이기를 반복함으로써 추상화해나가는 작업으로 유명하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폴 세잔과 입체파 화가들이 형상을 해체해나간 데 비해 마이어슨은 그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왜곡함으로써 추상미술이 구상미술의 토대 위에 설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특히 컴퓨터, 스캐너 등 첨단 기계문명의 산물로 작업한다는 점에서 그의 작업은 곧 컴퓨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후기 산업사회의 현실을 반영하게 된다.

작가는 먼저 미디어에서 이미지를 채취하고 포토샵 작업을 통해 왜곡과 보정의 과정을 거친 뒤 이것을 다시 캔버스에 옮긴다. 요즘 많이 볼 수 있는 ‘선 디지털작업-후 프린팅’ 방식과는 완전히 다르다. 디지털 작업을 캔버스라는 전통적 회화 형식에 녹여낸 것이다. 이런 복잡한 제작 과정은 기계문명 속에서 수없이 왜곡되며 민낯을 잃어버린 우리 삶에 대한 뼈아픈 은유로 받아들여진다.

이번에 출품된 10점의 작품은 그런 작가의 의도와 복잡한 작업의 여정을 잘 보여준다. 가로 6m, 세로 2m의 대작 ‘죽음의 발명 앞에’는 거대한 도시의 수많은 단편이 압착기로 찌그러뜨린 것처럼 뭉개져 있지만 어렴풋이나마 형태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다.

디지털 작업을 정밀하게 캔버스에 옮겼지만 간간이 회화에서 볼 수 있는 선의 맛도 느낄 수 있어 디지털 아트도 전통회화도 아닌 새로운 개념의 추상 회화를 빚어내고 있다.

이 밖에 광고 촬영 세트장을 배경으로 사용된 이미지를 왜곡하고 재해석한 ‘단 한 번의 여행이 인생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기이한 형태의 나무에 둘러싸인 홍콩 거리를 묘사한 ‘평원’ 등이 관객을 맞이한다.

전시 개막에 맞춰 서울에 온 마이어슨은 “눈에 보이는 작품도 그리는 과정에서 왜곡의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며 “내 작품은 특정한 장소를 그렸다기보다 내면의 장소를 그린 것”이라고 말했다.

1972년 인천에서 태어나 네 살 때 미국으로 입양된 마이어슨은 미니애폴리스 칼리지 오브 아트 앤드 디자인과 펜실베이니아 순수미술 아카데미에서 회화를 전공했고 뉴욕, 파리, 서울을 거쳐 현재 홍콩에서 작업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뉴욕의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과 첼시 미술관, 런던의 사치갤러리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02)720-1524~6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