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매출 40억 SSM 여는데 보상금 10억 내라니…"
대형 유통업체 A사는 지난달 경기도 한 중소도시에 기업형슈퍼마켓(SSM)을 내려던 계획을 무기한 연기했다. SSM 입점 소식이 알려지자 주변 상인들이 중소기업청에 개점 시기와 영업시간 등에 관한 사업조정을 신청한 것. 상인들은 사업조정을 철회하는 대가로 10억원의 보상금을 요구했다. A사 관계자는 “예상 연 매출이 40억원인 점포를 열면서 10억원을 보상금으로 주면 이익을 내기가 어렵다고 판단해 입점을 보류했다”고 말했다.

대형마트와 SSM에 대한 사업조정을 남용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중소상인을 보호하려는 취지로 마련된 사업조정이 유통업의 진입 장벽으로 작용해 경쟁을 제한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권리금 하락까지 보상 요구

30일 중기청에 따르면 대형마트 및 SSM과 관련해 45건의 사업조정이 진행되고 있다. B대형마트는 울산에서 영업시간을 놓고 중소 상인들과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오후 8시 이후엔 영업을 하지 말라”는 것이 상인들의 요구사항이다. B대형마트는 퇴근길 쇼핑객이 집중되는 저녁시간에 영업을 하지 말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라며 맞서고 있다.

판매 품목 제한은 ‘단골 메뉴’다. C대형마트는 충북에서 “채소 생선 등 신선식품과 주류 담배를 팔지 말라”는 요구를 받았다. “대형마트 주변 상가의 권리금 하락 등 부동산 가치 하락분까지 보상해달라”는 경우도 있다.

중기청에 사업조정이 접수되면 유통업체는 조정을 신청한 상인회와 자율조정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때 개점 시점과 영업시간 및 판매 품목 제한 등에 대한 논의가 이뤄진다. 자율조정이 결렬되면 중기청이 조정안을 마련해 이행명령을 내린다.

유통업체와 상인들 간 타협이 원만하게 이뤄진 경우에도 부작용이 뒤따른다. 사업조정 내용이 알려지면서 다른 지역 상인들의 요구사항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한 대형마트 관계자는 “어느 지역에서 상생기금 명목으로 10억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다른 지역에서는 20억원을 요구한다”며 “‘일단 사업조정을 신청하면 뭔가 얻어낼 수 있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고 말했다.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상인들을 조직해 사업조정을 신청하고, 배후에서 협상을 조종하는 ‘브로커’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업조정 안 따르면 영업정지

이렇다보니 사업조정이 대기업과 중소상인의 상생을 유도하기보다는 시장 진입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사업조정이 그 자체로 출점이나 영업을 중단시키는 조치는 아니지만, 진행 과정에서 개점이 늦어지고 영업활동에 제약이 생긴다는 것이다.

홈플러스는 지난해 8월로 예정돼 있던 합정점 개점이 사업조정을 거치면서 예정보다 7개월가량 늦어져 하루 3000만원의 이자비용을 추가로 부담했다.

이마트 홈플러스 롯데마트 등 3대 대형마트는 지난해 25개 점포를 새로 냈지만 올 상반기에는 4개밖에 열지 못했다. 롯데마트 관계자는 “출점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사업조정이 들어올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지역에는 아예 출점을 포기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중기청의 사업조정 권한을 강화한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통과돼 부작용이 더 커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개정안은 대기업이 사업조정 권고안을 따르지 않을 때 중기청장이 영업 일시정지 명령을 내릴 수 있도록 했다. 일시정지 명령을 어기면 50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내야 한다.

‘사업 개시 후 90일까지’였던 사업조정 신청 기한은 180일까지로 연장됐다.

이에 대해 중기청 관계자는 “홈플러스 합정점의 경우 출점 과정에서 주변 상인들과 일부 문제가 있었지만 개점 이후 양호한 실적을 이어가고 있다”며 “사업조정이 원만하게 이뤄지면 대형마트와 상인 간 협력을 바탕으로 상호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 사업조정제도

대기업의 사업 개시나 확장으로 중소기업, 중소상인 등이 타격받을 가능성이 있을 때 중소기업청이 나서 대기업의 사업 진출을 연기하거나 축소하도록 하는 제도. 상인연합회 등 중소사업자단체가 신청 자격을 갖는다.

유승호 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