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국에서 물가 상승률이 둔화하는 ‘디스인플레이션(disinflation)’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주요국의 성장 속도가 떨어지면서 설비투자와 내수소비가 살아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양적완화 정책을 통해 불어난 자금도 생산활동보다는 주식시장 등 금융시장에서만 맴도는 양상이다.

양적완화의 역설…'디스인플레' 조짐

○돈은 푸는데 물가는 그대로

최근 들어 세계 주요국들은 경쟁적으로 양적완화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불을 붙인 것은 일본이다. 일본은행은 지난달 초 시중 유동성을 2년 내 두 배로 늘리겠다고 선언했다. 곧바로 유럽연합(EU)이 기준금리를 연 0.75%에서 연 0.5%로 낮췄고, 이달 들어 인도 호주 한국 베트남 이스라엘 터키 등이 줄줄이 금융완화 행렬에 동참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과잉유동성의 양을 재는 지표 중 하나인 ‘월드 달러’가 이번 달에 6조달러로 불어났다”고 보도했다. 리먼브러더스 사태가 터지기 전인 2007년에 비해 3배가량 늘어난 수준이다.

돈은 풀렸지만 물가는 잠잠하다. 미국의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달 대비 오히려 0.4% 떨어졌다. 2008년 12월 이후 가장 큰 하락 폭이다. 같은 기간 유럽의 소비자물가 상승률 역시 2010년 2월 이후 최저치인 1.2%에 그쳤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전체의 지난 1분기(1~3월) 평균 소비자물가 상승률(전년 동월 대비)도 1.7%로 2년 반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JP모건체이스가 집계한 신흥국 포함 주요 30개국의 1분기 평균 물가 상승률 역시 2년6개월 만에 가장 낮은 2.4%에 불과했다. 니혼게이자이는 이를 디스인플레이션으로 표현했다.

○자산 거품 붕괴 우려도

낮은 물가 상승률은 그만큼 경기가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니혼게이자이는 “선진국에 이어 중국 인도 등 신흥국의 성장 속도마저 떨어지면서 비용 증가에도 불구하고 제품 가격을 올리지 못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고 진단했다. 생산활동 둔화로 원자재 가격도 하락세다. 원유값은 작년 최고치보다 10%가량 떨어졌고, 구리 등 광물자원 가격도 최고치 대비 20% 정도 하락했다.

고삐가 풀린 유동성은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채 주식시장 등 금융자산으로만 몰리고 있다. 일본 미국 등의 주가가 이달 들어 사상 최고치를 잇달아 경신했고, 필리핀 태국 등 신흥국 주식시장도 전년 대비 40% 이상 급등했다. 가라카마 다이스케 미즈호은행 애널리스트는 “상품가격은 떨어지는 가운데 주가만 오르는 것은 비정상적인 상황”이라며 “자산 거품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도쿄=안재석 특파원 yagoo@hankyung.com


■ 디스인플레이션

disinflation.

물가가 급격히 오르는 ‘인플레이션’과 달리 소비자물가 상승률 수준이 평년치를 크게 밑도는 상태로 정체되는 것을 ‘디스인플레이션’이라고 한다. 디스인플레이션이 길어지면 물가가 지속적으로 하락, 경기가 장기침체 국면에 접어드는 ‘디플레이션’에 빠질 우려가 높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