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열차에서 잠시 내려 멈춤의 미학을 붓질했죠"
“미술은 언어와 인종이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매개체 구실을 합니다. 어린아이와 청소년부터 100세 노인에 이르기까지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상상력과 감성을 깨우거든요. 그래서 미술을 만국공통어라고 하는가 봐요.”

서울 인사동 공아트스페이스에서 내달 2~12일 개인전을 여는 재불화가 황호섭 씨(58·사진). 그는 30여년 미술에 전념해 온 전업 화가답게 만나자마자 미술 얘기부터 꺼냈다. 서울과 뉴욕, 파리를 주 무대로 활동해온 화가는 “내 작업은 획일적인 목소리를 관람객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관람객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도록 하는 소통”이라며 “요즘 관람객들이 정말 원하는 미술은 작가의 의도가 솔직하고 간결하게 담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회화, 조각, 설치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작업하고 있는 황씨는 1984년 파리 국립고등장식미술학교 졸업전에서 유럽 최고 화상인 장프루니에의 눈에 든 후 승승장구했다. 1980~1990년대 프랑스 메이저 화랑인 장프루니에갤러리 전속작가로 활동하며 파리 뉴욕 도쿄 서울 등 국내외 유수의 화랑에서 100회에 가까운 개인전과 그룹전을 가졌다. 2010년 서울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땐 각국 대표의 얼굴 작품을 코엑스 전시장에 걸어 주목받았다. 이번 전시회는 친구인 제롬 바스키에 주한 프랑스대사의 후원으로 열게 됐다고 한다.

“제 친구 바스키에는 서울에서 미술과 관련된 일을 하다 만났는데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파리의 아시아미술관 학예실장에게 연락해 부랴부랴 전시회를 후원해주더군요. 전시 서문도 직접 써 줬고요.”

황씨는 그동안 붓으로 대상을 그리는 대신 캔버스 위에 손으로 물감을 반복해서 뿌리고 건조된 정도에 따라 뿌려진 물감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최근에는 종전의 물감 ‘씻어내기’ 방식에서 벗어나 물감을 떨어뜨리고 덧칠하는 ‘묻어두기’ 방식으로 바꿨다.

“인간의 욕망이 무한히 계속되듯 그동안 제 작업 역시 ‘멈춤이 없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작업실에서 문득 ‘절제’라는 단어가 머리를 스쳐 지나가더군요. 그때부터 멈춤과 절제를 중시하는 그림을 시작했죠. 작품에 변화를 주며 균형과 절제의 미학을 추구한 겁니다.”

황씨의 출품작들을 보면 검은색을 바탕으로 여러 색이 뒤엉킨 ‘물감들의 유희’ 속에서 우주를 하나로 묶어주는 힘이 느껴진다. 검은색 계통의 물감들이 덩어리져 고이기도 하고 서로 엉키는가 하면 흙탕물처럼 튀기도 하고 비처럼 흘러내리기도 한다. 운모 망간 금분 동가루 등 독특한 광물성 안료를 활용해 우주 공간을 더욱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황씨는 “특정한 대상을 의식하지 않고 물감을 떨어뜨리고 덧대는 작업을 통해 관람객들로 하여금 절제의 미학을 느끼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세상의 근원에서’를 주제로 한 이번 전시에는 생명의 생성·변화·소멸과 또 다른 생성을 반복하며 진화해나가는 우주 공간에 초점을 맞춘 신작 30여점이 걸린다. (02)735-9938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