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재 R&D전략기획단장은 “중견·중소기업의 제품 개발 자체가 석·박사 학위 논문 주제가 돼야 한다”고 산·학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
박희재 R&D전략기획단장은 “중견·중소기업의 제품 개발 자체가 석·박사 학위 논문 주제가 돼야 한다”고 산·학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
“첫 수출대금 중 1달러 지폐를 인출해 표구로 만들어 회사에 모셔두고 있습니다.”

박희재 산업통상자원부 R&D전략기획단장(52)은 외환위기 직후였던 1999년, 창업한 지 1년 만에 벌어들인 1만달러의 감격과 의미를 이렇게 강조했다. 1998년 서울대 기계공학부 교수로 있으면서 실험실에서 액정표시장치(LCD) 검사장비 회사 에스엔유(SNU)프리시젼을 설립한 뒤 스웨덴 업체에 제품을 첫 수출하면서다.

지난 17일 산업부는 그런 그를 R&D전략기획단장에 선임했다. 임기 3년인 R&D전략기획단장은 ‘국가 최고기술책임자(CTO)’로 불리는 자리. 한 해 3조5000억원 규모의 연구·개발(R&D) 예산을 관할하며 국가 R&D 정책을 총괄한다. 지난 25일 서울 역삼동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그의 목소리는 이론과 현장 경험을 겸비한 전문가답게 시종 확신과 자신감으로 가득 찼다.

▷교수와 사업가에 이어 세 번째 직업이 생겼습니다.

“그동안 교수와 벤처기업 최고경영자(CEO)를 동시에 잘해왔다고 생각합니다. 학교에서 강의하는 것도 대단히 즐겁고 학생들의 강의 평가도 좋았어요. 회사도 나름대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운영했다고 자부합니다.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할 것이라고 걱정하는 분들도 있는데 굉장히 자신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국가적 과업을 해내기 위해 수업을 점차 줄이고 회사 운영도 전문경영인에게 대폭 맡기려고 합니다.”

▷학자로서 사업에 뛰어들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창업 당시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 한가운데 있었어요. 금융 부실이나 정책적 대응 미흡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저는 한국이 외형적인 성장에 비해 핵심 기술을 국산화하지 못하는 등 내실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논문도 많이 쓰고 특허도 여럿 가지고 있었어요. 하지만 사업성이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데 기여하지 못했다는 점이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경쟁력 있는 연구 역량을 모아 시장에서 진검승부를 하는 게 시급하다고 판단했어요. 당시 함께 연구하던 대학원생 4명을 데리고 창업을 했죠.”

▷국내에는 연구를 사업으로 연결하는 학자들이 많지 않습니다.

“지난 10여년간 산학 협력하는 교수들이 씨가 말랐어요. 돈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부 R&D 예산 지원은 기초연구나 순수 연구에 집중돼 있어요. 산업 영역에서 손에 기름때 묻히는 것보다 앉아서 논문을 쓰는 게 더 쉽죠. 유력 과학 전문지인 네이처나 사이언스에 실리면 뭐합니까. 경제에 도움이 얼마나 될까요. 향후 5~10년 대학에는 기초연구만 하는 사람밖에 남지 않을 것입니다. 굉장히 아찔합니다.”

▷하지만 미래창조과학부는 2017년까지 정부 R&D 예산에서 기초연구 비중을 40%까지 늘리겠다고 발표했는데요.

“그런 얘기를 들으면 아연실색합니다. SCI(국제 과학기술논문 인용 색인)급 논문 수를 늘리겠다는 얘긴데 결국 아이를 키우지는 않고 낳는 과정만 반복하는 것입니다.”

목소리를 높이던 박 단장은 갑자기 호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최근 한 포럼에서 들은 한국의 글로벌 혁신지수(GII) 순위를 적어둔 것이라고 했다. GII는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가 전 세계 141개국을 대상으로 평가해 매년 발표한다. WIPO에 따르면 한국은 지난해 논문·특허 수를 나타내는 지식창출 부문에서 3위를 기록했다. 반면 기술 사업화·표준화를 가리키는 지식효과 부문과 기술 서비스화를 나타내는 지식확산 분야에서는 각각 43위와 20위였다. 이처럼 기초연구는 이미 충분하다는 게 박 단장의 생각이다.

▷기초연구를 상업화할 수 있도록 집중 지원하면 되지 않습니까.

“순수기술 연구와 상용화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습니다. 결국 기술을 사업화하는 것은 기업인데 기초연구 기술을 상업화할 수 있는 기업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기업이 필요한 방향으로 R&D를 해야 합니다. 산학 연계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외국 상황은 어떤가요.

“대표적인 모범 사례가 독일 프라운호퍼연구소입니다. 산업 문제에 연구원들을 집중 투입해 해결책을 찾습니다. 독일에 세계적 기술을 보유한 강소기업인 히든챔피언이 많은 이유 중 하나입니다. 영국도 2008년부터 무역산업부가 40여개 대학을 분야별로 산업체와 연결해 석·박사 인력을 투입하고 있습니다.”

▷R&D전략기획단의 산학 협력 전략은 어떻게 구현할 생각입니까.

“산학 협력은 특히 중소·중견기업에 필요합니다. 이들 기업의 가장 큰 어려움은 인력 부족입니다. 예산을 지원한다고 해도 R&D 성과를 사업화할 수 있는 사람이 부족합니다. 중소·중견기업의 사업 초기 단계부터 대학 연구소를 연결해줄 생각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중소·중견기업의 제품 개발 자체가 석·박사 학위 논문 주제가 돼야 합니다. 제품 개발과 사업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도록 석·박사 인력을 투입하는 것이죠.”

▷중소·중견기업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성장동력을 찾는 일입니다. 차별화한 제품과 서비스를 시장에 내놓아야 합니다. 글로벌 전문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시장에서 차별화돼야 합니다. 이를 위해 R&D전략기획단은 썰매를 타다 뒤에서 누군가 세게 밀어주면 한 번에 질주할 수 있는 것처럼 중소·중견기업을 ‘빅 푸시(Big Push·크게 밀다)’하겠습니다. 기업이 필요한 사항을 알려주면 그에 맞춰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중소·중견기업이 스스로 경쟁력을 갖출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중소·중견기업의 매출 대비 R&D 비중은 1.5% 정도입니다. 거의 투자를 안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저도 지난해 회사가 150억원의 적자를 보는 등 어려웠지만 매출액 대비 R&D 비중을 10~15% 정도로 유지했습니다. 그 결과 지난해 신사업으로 나선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검사 장비 발주를 따냈습니다. R&D야말로 터널 속에 있는 기업의 마지막 등불입니다.

조미현/김홍열 기자 mwise@hankyung.com

창조경제 핵심은 일자리 “나도 1800명 고용 창출”

박 단장이 말하는 ‘창조경제’란 뭘까.

그는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대학에서 핵심 기술을 개발했고, 대학 인력과 함께 기업을 만든 자신의 예를 들었다. “에스엔유(SNU)프리시젼은 전 세계 10여개국 20여개 업체에 제품을 팔고 있다”면서 창조경제의 파급력을 술술 풀어냈다.

“처음 창업할 때는 직원이 4명이었지만 지금은 300명이 근무하고 있다”며 “협력업체 가운데 매출의 절반을 의존하는 업체가 50여개에 달해 이들 업체의 종업원을 합치면 모두 1800명 정도의 일자리를 창출해냈다”는 것. 그는 “그들과 가족의 삶이 우리 비즈니스에 달려 있다”며 “단순히 기술 개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생태계를 조성했다”고 자부했다.

SNU프리시젼도 정부에서 지원을 받았다고 소개했다. “태양전지 신사업 등에서 연구비 지원을 받았다”는 그는 “여전히 연구비가 모자라고 절실한 것은 사실이지만 R&D전략기획단장으로 있는 동안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일절 국가과제를 안 할 방침”이라고 약속했다.

■ 박희재 단장은 누구

산업통상자원부 R&D전략기획단장은 그의 세 번째 명함이다. 첫 번째 명함은 서울대 기계공학부 교수. 1961년 경기 김포시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 우신고와 서울대 기계설계학과를 졸업했다. 영국 맨체스터대에서 기계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1년 포스텍 산업공학과 조교수로 부임한 데 이어 2년 뒤 모교인 서울대 기계공학부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그로부터 5년 뒤 박 단장은 두 번째 명함을 갖게 됐다. 1998년 학내 실험실에서 대학원생 4명과 액정표시장치(LCD) 검사장비를 개발하는 에스엔유(SNU)프리시젼이라는 회사를 창업한 것. 대형 LCD 검사장비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 회사는 2005년 코스닥시장에 입성했다. 박 단장은 회사가 상장되자마자 80억원 규모의 주식을 모교에 기부했다. 매출 400억원대로 성장한 SNU프리시젼은 LCD뿐 아니라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태양전지 장비 등도 생산하고 있다. 박 단장은 현재 이 회사 지분 21.3%를 보유하고 있는 최대주주다.

조미현 기자 mwis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