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팀 리포트] "금녀구역은 없다"…경찰 '女풍당당'시대
지난달 29일 단행된 경찰 인사에서 경찰 창설 이래 첫 여성 치안정감이 탄생했다. 주인공은 이금형 경찰대학장(55·당시 경찰청 경무인사기획관). 이 학장이 1977년 12월17일 순경 공채로 경찰 제복을 입은 지 36년 만이다. 치안정감은 차관급인 경찰청장(치안총감) 바로 아래 계급이다. 치안정감은 서울경찰청장, 경기경찰청장, 경찰대학장, 부산경찰청장, 경찰청 차장 등 다섯 보직뿐이다.

‘사건’에 비유될 정도의 예상 밖 인사를 두고 박근혜 대통령을 의식한 ‘코드 인사’라는 폄하도 있지만 1946년 미군정청 경무부 공안국에 여성경찰과가 창설된 이래 여경들이 쏟아낸 노력과 도전 정신의 결과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67년의 여경 역사를 돌이켜볼 때 1998년 김강자 총경(충북 옥천경찰서장) 이전까지 일선 경찰서장급인 총경(4급)에 오른 여경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경찰대에 여학생 입학이 허용된 1989년 이후 여경들은 활동 반경을 ‘금녀(禁女)의 영역’이었던 강력·형사 분야로 넓혀나가고 있다. 여성 최초 치안정감의 탄생을 계기로 여경들은 ‘첫 경찰청장 탄생’이라는 또 한 번의 기록을 기대하고 있다.

◆여경 67년…‘경찰의 별’ 경무관 이상은 2명

[경찰팀 리포트] "금녀구역은 없다"…경찰 '女풍당당'시대
한국 여경 역사는 해방 직후 시작됐다. 1946년 미군정청 경무부 공안국에 여자경찰과가 생기면서다. 당시 뽑힌 80명의 여경은 고등학교 이상의 학력에 단정한 용모를 갖춘 재원들이었다. 자주색 치마, 점퍼식 윗옷에 빵모자를 쓴 여경들은 요즘 ‘아이돌 스타’ 부럽지 않을 만큼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여성은 주로 수사 부서보다 내근으로 배치되는 구조 때문에 승진에서 번번이 ‘쓴잔’을 들이켰다. 1990년대 들어서야 여경의 활동 영역은 수사·정보·경비 등 모든 분야로 넓어졌다.

변화하는 시대상에 맞춰 경찰 조직 내에서 여경들은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이며 주요 보직을 꿰차고 있다. 이 학장은 여경 창설 65년 만인 2011년 첫 여성 치안감에 올랐다. 지난달엔 경찰 ‘빅6’인 치안정감으로 승진했다. 설용숙 분당경찰서장은 역대 세 번째 여성 경무관으로 현직 여성 ‘넘버 2’다. 경찰대 21기(2005년 졸업) 수석 졸업자인 전지혜 서울지방경찰청 여성경찰기동대 제대장은 “경비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여경도 많다”며 “곧 여성 청장도 나올 수 있고, 여경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경쟁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많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사건 1번지’로 불리는 서울 강남경찰서 강력계 수장은 박미옥 경감이 2년 넘게 맡고 있다. 순경 출신인 박 경감은 25년 경찰 생활 중 21년 동안 강력 사건을 맡았다. 2010년 마포경찰서 6개 강력팀과 마약수사팀을 지휘하는 최초 여성 강력계장 등도 지냈다. 이처럼 강력·정보·외사·경비·보안 등 남성 중심 분야에서 뛰는 여성은 792명에 달한다.

하지만 고위직으로 갈수록 여경의 비율은 줄어든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 2월 말 기준으로 전체 경찰 10만2652명 가운데 여경은 7804명(7.6%)을 차지한다. 경감(6급) 이상 간부는 285명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여경이 줄어든다. ‘경찰의 꽃’으로 불리는 총경의 여성 비율은 전체 487명 가운데 6명(1.2%)에 불과하다. ‘경찰의 별’인 경무관은 전체 46명 가운데 단 1명(2.1%)뿐이다.

◆경찰대 출신 수혈…기동대·강력계도 여풍

여경의 지위가 새롭게 정립된 계기는 ‘금녀의 구역’이던 경찰대가 1989년 여학생 입학을 허용하면서부터다. 신입생 120명 가운데 여성은 10%(12명)밖에 뽑지 않지만, 최근 경찰대를 졸업한 여성들의 활약상은 주목할 만하다. 최근 10년간 경찰대 수석 졸업자는 6번이 여성이었다. 2006년 경찰대 22기 졸업식에는 1~3위 졸업생이 모두 여성이었고, 2008년 24기 졸업식은 1위와 3위가 여성이었다.

경찰대 출신 첫 총경도 배출됐다. 윤성혜 충남지방경찰청 수사과장은 2010년 총경으로 승진했다. 당시 나이 40세로 다른 경찰대 남성 동기나 선배들보다도 빠른 진급이었다.

프로파일링과 범죄심리분석 분야에선 여성 프로파일러(범죄심리분석관)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전체 프로파일러 37명 가운데 26명이 여경이다. 프로파일러인 이진숙 경사는 “사건 현장을 1차로 분석하는 프로파일러의 업무상 여성의 섬세함이 도움이 되고, 범죄자의 순간 순간의 감정을 잡아내는 예리함이 뛰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경찰청 과학수사센터 소속 강은경 프로파일러는 “피의자의 긴장과 경계의 벽을 허무는 것을 ‘라포형성(마음의 유대)’이라고 하는데 피의자들이 남성 형사보다는 상대적으로 여성에게 심리적인 경계의 벽을 잘 허무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프로파일러뿐 아니다. 남성 위주의 조직문화가 지배하던 경찰 조직에 부드러운 카리스마와 섬세함으로 무장한 여장부들이 강력·경비·정보 등 남자들의 전유물이었던 부서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공정한 수사로 신뢰를 쌓아가는 것도 여경의 장점이다. 2011년 국민 500명을 대상으로 경찰의 공정성 수준에 대한 설문조사에선 여경에게 조사받았던 국민 85.3%가 공정하다고 응답해 남성경찰(63.9%)보다 더 공정하게 느꼈던 것으로 나타났다.

◆‘유리천장’…역차별인가 현실의 벽인가

갈수록 거세지는 경찰 내 여풍은 사상 첫 여성 경찰청장의 탄생으로 이어질까. 경찰 내부에선 ‘시기상조’라는 분위기가 우세하다. 사상 첫 여성 치안정감이 탄생한 것도 첫 여성 대통령에 맞춘 ‘코드 인사’라는 부정적인 시선도 있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경우도 리사 모나코 백악관 대테러·국토안보 보좌관(44)이 신임 국장 물망에 올라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여성 국장이 임명된 적은 없다.

한국 여경의 진출 분야는 일단 다양화에 성공했지만 대다수의 업무는 지구대나 경무, 생활안전 등 일부 분야에 집중돼 있는 것도 한계로 지적된다. 경찰 조직에서 남녀 평등이 완전히 이뤄졌다고 보기 힘든 이유다. 전체 여경 가운데 지구대 근무자는 23.9%(1867명)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그 다음은 인사 총무 등이 있는 경무 분야로 19.1%(전체 평균 5.8%), 여성청소년계가 속한 생활안전 분야 13.4%(전체 평균 8.0%)순이었다. 반면 집회나 시위를 막는 경비 0.8%(전체 평균 10.3%), 강력 3.6%(전체 평균 17.8%) 등은 여전히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또 나흘에 한 번꼴로 찾아오는 야간 당직,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각종 사건은 결혼한 여성 경찰들에겐 큰 장벽과도 같다. 이상희 경기 의왕경찰서 경사는 “몇 년 전 새벽에 화물연대 파업 현장에 나가야했는데 유모차에 아이를 태워 출동한 적이 있다”며 “늦은 시간까지 운영하는 보육시설만 있어도 덜 고민할 텐데, 엄마와 아내 그리고 경찰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경찰 내부에서 꾸준히 논의된 여경 채용 목표제와 승진 목표제 시행은 몇 년째 제자리걸음이다. 경찰은 2005년 총경·경정의 경우 승진 대상(승진에 필요한 최소 기간을 채운 사람)이 된 여경의 30%, 경감은 10%를 별도로 승진시키는 ‘여경 승진 목표제’를 시행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아직 논의조차 되고 있지 않다. 또 여경의 숫자를 2014년까지 전체 경찰의 10% 수준(1만명)으로 늘리는 ‘여경 채용 목표제’도 추진했으나 아직 7.6%에 머물고 있다.

종암경찰서장을 지낸 김강자 한남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과거에 비해 간부직에 오른 여경이 늘어난 것은 바람직하다”며 “그러나 고위직으로 갈수록 두꺼워지는 ‘유리천장’에 대해 경찰 내부 논의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김우섭/하헌형/박상익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