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미국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을 꼽으라면 역시 프랭클린 루스벨트이다. 루스벨트는 1932년 선거에서 공화당의 후버 당시 대통령을 압도적인 차이로 누르고 승리한다. 당시 미국은 1929년 주식시장의 대붕괴로부터 촉발된 대공황이라는 전대미문의 경제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1932년 미국의 국민총생산은 대공황 발생 전인 1929년의 56%에 불과했고, 실업률은 물경 23.5%였다. 그나마 일자리가 있는 노동자 가운데 작지 않은 비중이 파트타임 노동자였다. 총노동시간으로 따지자면 1929년의 60%에, 다우존스 지수는 대공황 이전의 10% 수준에 불과했다.

수많은 은행이 도산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현재와 같이 1월이 아니라 3월에 취임했다. 루스벨트가 취임한 1933년 3월4일은 토요일이었다. 예금인출 사태(뱅크 런)에 따라 당일까지 38개 주에서 은행들이 폐쇄됐고 나머지 주에서는 영업을 해도 하루에 인출할 수 있는 금액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었다. 뉴욕의 주식거래소는 폐쇄됐고 언제 개장한다는 발표조차 없었다. 대부분의 은행과 금융의 중심 뉴욕 주식거래소가 폐쇄됐으니 자본주의의 심장이 멈추기 직전인 셈이었다.

낙관주의자 루스벨트는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일 뿐”이라는 유명한 취임연설을 남긴다. 그리고 즉시 행동에 들어간다. 다음날 의회 소집을 요구하고 의회의 결정이 있을 때까지 전국 모든 은행을 폐쇄한 다음 은행가들과 만나 의견을 청취했다. 청취한 의견을 반영해 재무부로 하여금 긴급은행구호법을 마련하도록 했다. 법안은 3월9일 목요일 오후 1시에 하원에 제출됐고 38분 만에 만장일치로 통과됐으며 상원에서는 7표의 반대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날 저녁 8시38분 루스벨트는 법안에 서명했다.

긴급은행구호법은 은행산업과 외환에 대한 광범위한 규제와 대통령의 권한을 담았다. 전국의 은행은 3월13일 월요일에 개장하기로 결정됐다. 그 전날인 12일 일요일 저녁에 그 유명한 루스벨트의 ‘노변정담’ 첫 번째 편이 라디오로 방송됐다. 약간은 귀족적이지만 삼촌 같고, 훈계조이기도 하지만 편안한 목소리로 루스벨트는 돈을 침대 밑에 넣어두는 것보다 다음날 은행이 열리면 은행에 넣어두는 편이 안전할 것이라고 말한다. 미국민은 그를 믿었고 돈은 다시 은행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미국 경제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 것이다. 루스벨트의 가장 가까운 보좌관 레이먼드 몰리는 루스벨트가 8일 만에 자본주의를 구원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취임 이후 100일간의 루스벨트의 업적은 그가 네 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되도록 할 만큼 혁혁한 것이었다. 증권 관련 첫 연방규제인 연방증권법을 통해 투자자에게 필요한 정보를 공개토록 해 금융산업을 혁신했으며, 그때까지 미미했던 사회안전망을 확충하거나 새로 도입했다. 뉴딜 정책의 골간도 형성됐다. 그 결과 1933년 한 해에 다우존스 지수가 60% 상승했으며 경제는 하락을 멈췄다.

루스벨트는 준비된 대통령의 전범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취임 첫 100일간 일을 처리한 내용을 들여다보면 어떻게 이렇게 해야 할 일을 꿰뚫고 있었을까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행운아였던 측면이 있다. 당시 미국은 도약하는 독수리였던 것이다. 완성되지 않은 자본주의에 닥친 대공황이란 쉽지 않은 질병을 앓고 있었으나 미국경제는 근본적으로 빠르게 성장하는 도약 국면에 있었다. 쉬웠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웬만한 처방이면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당시의 미국에 비하면 지금 우리의 상황은 비관적이다. 지금의 경제 문제들이 더욱 심각한 것은 우리 경제가 저성장으로 하강하는 국면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경제는 잠재성장률이 어딘지를 모르고 하강하고 있다. 이번 위기 전만 해도 우리의 잠재성장률이 4.5% 정도는 된다고들 추정했다. 지금은 그렇게 높게 보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다. 이 중차대한 국면에 우리의 대통령과 정치는 어디에 있는가. 대통령을 보좌하는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가. 아직 늦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벌써 5년 뒤가 눈에 어른거리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조장옥 <서강대 교수·경제학 choj@sog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