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6월 독일 연방최고재판소는 미국인 원고가 독일인 피고를 상대로 자국 법원에서 받아낸 총 75만260달러의 손해배상 판결 집행을 구한 사건에서 40만달러는 기각하고 나머지 35만260달러의 집행만을 승인하는 판결을 내렸다. 미국 법정은 미성년자인 원고가 피고로부터 동성애를 강요당했다며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한 사건에서 피고는 원고에게 신체 상해 치료비 260달러, 정신적 치료비 10만달러, 치료에 들어가는 숙박비 등 필요경비 5만달러,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 20만달러, 그리고 징벌적 배상으로 40만달러, 도합 75만260달러의 배상을 판결했다. 독일 최고재판소의 논지는 미국식 징벌적 배상제도는 자국의 공서양속(公序良俗)에 반해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실제 입은 손해만큼만 배상해야 한다는 실손전보(實損塡補)의 원리는 우리를 비롯한 대륙법계 배상원칙의 핵심이다. 미국식 징벌적 배상판결의 집행은 독일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그리고 한국에서도 하급심에서 문제된 바 있다.

새 정부의 경제민주화 관련 정책 가운데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와 집단소송의 도입이 진지하게 검토되고 있다. 징벌적 배상제도는 하도급법의 기술탈취 행위에 이미 운용되고 있는 까닭에 엄밀히 말하자면 신규 도입이 아니라 여타 하도급법 위반행위로까지 확대 적용할지, 공정거래법 전반에 걸쳐 시행할 것인지의 문제다.

하수급자나 소비자의 경우 경제적으로 열등한 지위에 있어 소송을 제기하기 어렵고, 설령 제소하더라도 손해 발생과 그 범위를 입증하기 쉽지 않으며, 절대적 기준으로 보면 금액도 많지 않아 소송 제기의 실익이 없는 경우가 많고, 이런 점을 사업자가 악용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징벌적 배상을 통해서라도 위반 억지력을 키워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외국 판결의 제3국에서의 집행 사례에서처럼 징벌적 배상제도는 단순히 우리 국내법의 한 분야에 도입돼 우리끼리 시행하고 말 일이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아직은 지엽적인 개별법령의 어느 특정 행위에 국한돼 큰 문제가 없겠지만, 만일 하도급법, 나아가 공정거래법 전반에 걸쳐 이 배상원리가 시행된다면 향후 한국 법원이 미국 법정에서 나온 징벌적 배상 판결을 배척할 명분은 없어진다. 우리 국민과 기업을 상대로 미국 법원이 내린 고액의 징벌적 배상판결을 그대로 한국 법원이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2008년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경쟁법 위반 행위 억지력을 높이고 피해자 구제 활성화를 꾀한다는 차원에서 사소(私訴) 활성화에 관한 백서를 발간했다. 유럽의회와 유럽경제사회위원회는 미국식 집단소송과 징벌배상이 가져올 소송 남용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특히 소송 남용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는 변호사 성공보수제도를 불허해야 한다며 공익대표소송 등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징벌적 배상제도 집단소송 도입을 동시에 검토하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새겨들을 만한 견해다.

필자는 징벌적 배상제도를 굳이 도입하지 않고 지금의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에 정해진 지연손해금 가산 제도만 적극적으로 활용하더라도 경제적 약자를 보호하는 데 충분한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처럼 법원이 관행적으로 사실심 선고일까지 연 5%의 지연손해금만 부과하고, 또 조정 화해 등으로 끝나는 경우엔 그나마 없던 일이 되고 소송비용 부담마저 흐지부지되는 상황에서는 “먼저, 알아서 주는 쪽이 바보”가 된다. 법정으로 가 보았자 손해 날 것이 없다는 배짱의 토양이고, 경제적 약자를 울리는 원인(遠因)이기도 하다.

공정거래법 위반 관련 손해배상청구 사건에서는 소 제기 때부터 연 20% 이상의 지연손해금 가산을 법정화하고, 판결 외의 형태로 소송이 종결되더라도 반드시 소송비용을 원인제공자에게 물리도록 엄격한 조치를 취한다면 우월적 사업자들의 ‘배째라’ 관행은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징벌적 배상제도의 부작용을 감수하지 않고도 현재의 법 운용 방향을 조금 바꿔 경제주체 간 균형을 잡는 일이 가능하다면 그 일부터 하는 게 순리다.

이호선 < 국민대 교수·법학 hosunlee@kookmin.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