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우리 애 좀 봐줘" 사모님 부탁에 "네" 했다가…헉! 고 3이네…원서접수까지 '뒤치다꺼리'
“요즘 일본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한국 음악이 뭔지, 캐나다로 소포 보낼 때 어떻게 하면 싸게 할 수 있는지, 옷에 밴 찌개 냄새 제거하는 방향제는 뭘 쓰면 좋을지…. 내가 포털 사이트니? 당신 손에 든 그 최신 스마트폰은 장식품이야? 아니, 그 정도는 물을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오늘 환율, 물론 달러 정도는 얘기해줄 수 있어. 나라별로 내가 어떻게 다 외우냐. 갑자기 오늘 며칠이냐고 물으면 나도 아무 생각 안 날 때가 있어. 그런 건 그냥 네 책상 위에 있는 달력 한 번만 봐주면 안 돼? 바로 대답 못한다고 월요일 아침부터 그렇게 깨야겠니.

그리고 물맛이 변한 게 아니라 당신 입맛이 이상한 거야. 간식 시킬 땐 먹고 싶은 메뉴를 그냥 바로 좀 말해봐. 꼭 갖고 들어가면 이건 아니다 퇴짜를 놓아서 두 번 일하게 하지 말고. 똑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말라고? 너나 잘하세요. 내가 몇 번을 말해. PDF파일은 수정이 안 된다고. 정 하고 싶으면 프로그램을 다운받으란 말이야. 알집은 클릭 한 번 하면 풀려. 안 열린다고 징징대지 말고 내가 말할 때 귀담아들어.

당신 질문에 일일이 다 대답하는 걸 보면 주변에선 나한테 그래. 참 아는 게 많다고. 주말도 잊고 휴가도 없이 사는 날 보면 열심히 일하는 게 보기 좋다고도 하지. 그런데 말이야. 내가 정말 잘 아는 건 뭔지, 하루종일 왜 이렇게 바쁜 건지, 정말 모르겠어. 내 삶은 온통 당신 일정으로 가득 채워져 있거든.”

어느 비서의 못다 한 독백이다. 비서란 직책엔 환상이 스며 있다. 단정한 얼굴에 깔끔한 옷매무새, 똑 부러지는 말투와 절도 있는 행동. 그러나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애환이 가득한 비서들의 세계. 김과장이대리에서는 ‘보스의 수족’으로 살아가는 비서들의 삶을 들여다 봤다.

○비서는 몸종이 아니에요

경력 12년차 김 비서는 최근 중소기업으로 이직했다. 대표의 비서고 대우도 좋았다. 그러나 복병은 대표의 부인. “김 비서 공부 잘했다며? 우리 애 좀 도와줘.” 단순한 인사치레로 알고 흔쾌히 알겠다고 한 것이 화근이었다. 김 비서는 고등학교 3학년인 대표 딸의 수능전략설명회, 입학설명회 등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받고, 보고해야 했다. 수능 이후 대학 원서를 쓸 때까지 ‘뒤치다꺼리’는 계속됐다. “재수할까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내년에도 이 짓을 하느니 때려치겠다고 생각했죠. 제가 도대체 누구 비서예요?”

입시보다 더 큰 ‘행사’는 결혼식이다. 대기업체 사장을 모시는 박 비서는 사장 딸의 결혼식을 직접 준비했다. 청첩장 송부처 리스트부터 참석 확인까지 모두 처리했다. 결혼 후 축의금 내역 정리와 답례품 전달, 감사 편지를 보내는 것도 그의 주된 업무였다. 박 비서는 사장의 결혼식 관련 잡무가 다 끝난 어느 주말, 결국 몸살로 앓아 누웠다.

해외 출장도 비서들에겐 고난이다. 지난주 총수 출장에 동행한 최 과장은 비서들의 짐을 보고는 놀랐다. 6박8일 출장에 수행 비서 자신의 짐은 하나도 없었다. 사장의 옷가지와 생활용품 등을 담은 트렁크들뿐이었다. 본인 옷은 안 가져가냐는 최 과장의 질문에 비서는 이렇게 답했다. “양복 한 벌로 버텨요. 와이셔츠와 속옷은 현지에서 사서 입고. 돌아올 땐 짐이 더 많아지기 마련이니 제 가방을 따로 갖고 다니는 건 사치죠.”

수행 비서들에겐 겨울이 가장 힘든 때 중 하나다. 총수 등을 수행할 때는 아무리 날씨가 추워도 외투를 입지 않기 때문이다. 호텔 등이면 차라리 다행이지만, 거리에 있는 음식점에 총수가 약속이 있어 양복 차림만으로 덜덜 떨며 밖에서 동선을 파악하고 있을 때는 서러움이 파도처럼 밀려온다고 한다.

○외모로 평가받는 불편한 진실

모 대기업에선 몇 년 전 ‘여비서 사진 모음’이라는 메일이 사내 인트라넷에서 돌며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누군가 사내 인트라넷에 올려져 있는 여비서들의 사진을 한꺼번에 모아 모음집을 만들어 돌린 것. 당시 이 회사 직원들은 여비서들의 외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여비서들은 능력도 없이 외모 때문에 비서가 됐다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불쾌하다. 이 회사에서 당시 사진모음의 한편을 장식했던 조씨는 이후 다른 사무부서로 전출을 요청했다. “그 사건 이후 알지도 못하는 회사 직원들이 제 얼굴을 보고 수군거리는 게 싫었어요. 제 외모로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는 것도 불쾌했고요.”

이렇게 외모가 출중한데도 사장 비서인 신 대리는 올해 서른 중반의 나이지만 여전히 솔로다. 그녀는 사내에서조차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남자직원이 한 명도 없다는 게 내심 불만이었다. 그런데 회사 동기들과 술자리 중 우연히 얘길 듣게 됐다. “너 마음에 두고 있는 직원 몇 명 있긴 한데 절대 고백까진 못 가더라. 딱지 맞을까봐. 사귀다 깨져도 마찬가지고. 그럼 사장님 귀에 들어갈 테고 자신의 회사생활도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거 아니냐.” 신 대리는 입사 이후 처음으로 비서란 직업을 가진 스스로가 애처로웠다고.

○호가호위한다고?

소비재기업에서 영업통인 사장을 모시고 있던 이 비서는 현업부서의 상황을 파악해 사장에게 보고하는 역할까지 맡았다. 사장이 영업은 전문이었지만 다른 지원부서나 연구·개발(R&D) 방면을 잘 몰랐기 때문이다. 사장의 지시도 실무부서에 전달하다 보니 모두 이 비서에게 깍듯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이 비서는 거만해져 본인의 마음에 안 드는 일에 대해서는 각 부서 과장 이상 관리자들에게 지적질까지 해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2년 후 사장 임기가 끝나자 그는 ‘끈 떨어진 연’이 돼 실무부서 배치를 받았다. 그러나 비서 시절 자신이 휘두른 칼 때문에 요즘은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반면 대기업 비서 출신 조 차장은 조금 억울한 경우다. 회장 비서였던 조 차장은 하루 수십 건의 보고 업무에 효율적인 시간분배를 위해 핵심 용건만 전달했다. 그러다 보니 현업 팀장들에게는 냉정하고 무례한 사람으로 비춰졌다. 몇 년 후 비서 업무를 마치고 현업 배치를 받았지만 현장 경험이 없어 좌충우돌했다.

비서 시절엔 주변에 친절하고 상세하게 설명해주려던 이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관련 문서파일을 보내고 끝이다. “그땐 모든 일을 처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어요. 요즘 제가 잘 모르니 설명 좀 해달라고 하면 다들 그럽니다. 스스로 알려고 노력하라고. 본인이 아직 회장 비서인 줄 아냐고.”

윤정현/강경민/강영연 기자 h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