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외환시장에서 트레이더들이 입을 맞춰 교묘하게 환율을 조작한 혐의가 포착됐다.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주요 외신은 29일(현지시간) 싱가포르 역외차액결제선물환(NDF·Non-Deliverable Forward) 시장에서 트레이더들이 인터넷 메신저 등을 통해 특정 통화의 환율을 사전에 모의했다고 전했다.

이 같은 사실은 지난해 세계 금융시장을 강타한 리보(LIBOR·런던 은행 간 금리) 조작 사건이 터진 이후 싱가포르통화청(MAS)이 은행들을 조사하면서 밝혀졌다. 말레이시아 중앙은행은 자국 시중은행에 “싱가포르가 공시한 환율을 믿지 말고 국내 자체 환율을 기준으로 거래하라”고 권고했다. 말레이시아 은행들은 싱가포르은행연합회(ABS)가 매일 오전 NDF 거래량을 기준으로 공시한 링깃화 환율을 기준환율로 삼아왔다.

홍콩과 함께 아시아의 금융허브로 꼽히는 싱가포르에서 터진 이 사건에 전문가들은 “아시아판 리보사태가 벌어졌다”며 글로벌 은행에 또 한번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NDF, 외환시장의 대표 파생상품

NDF는 외환시장의 대표적인 파생상품이다. 실물 통화 거래가 이뤄지는 일반 선물환 거래와 달리 NDF는 만기 시점에 약정환율과 현물환율 간 차액을 결제통화(주로 미국 달러화)로 정산한다. 다른 나라에서 매매가 이뤄지기 때문에 투자자들이 세금이나 규제를 피할 수 있다. 원화나 중국 위안화, 브라질 헤알화, 대만달러화 등 외환시장의 규제가 강하거나 해외에서 잘 유통되지 않는 신흥국 통화가 주로 거래된다. 싱가포르 NDF 시장은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의 주범이라 불릴 정도로 신흥국 환율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환율 조작에 연루된 화폐는 인도네시아 루피아화, 말레이시아 링깃화, 베트남 동화다. MAS는 작년 7월 말 은행들에 금리 설정 방식을 자체 점검하라고 지시하면서 NDF 시장의 환율 설정 방식까지 함께 검토하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은행들은 일부 트레이더들이 온라인 메신저로 픽싱(fixing·만기 정산을 위한 환율 결정)을 위해 ABS에 제출할 환율을 사전에 모의한 사실을 밝혀냈다. WSJ는 “오늘은 네가 날 도와줘야겠다” “낮은 환율이 필요하다” 등의 메시지를 주고 받았다고 전했다. 싱가포르 NDF 시장에는 UBS JP모건체이스 DBS홀딩스 HSBC홀딩스 등 18개 은행들이 참여하고 있다. 어느 은행이 환율 조작에 관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NDF 거래량은 원화가 1위

NDF 환율은 시장에 참여하는 은행들이 특정 통화에 대한 현물환 가격을 ABS에 제출해 최고와 최저 환율을 제외한 환율 평균으로 산출된다. 문제가 된 화폐는 시장에서 많이 거래되지 않는 화폐로, 트레이더들이 각자 거래한 결과를 기준으로 평균을 내는 ‘폴 방식’으로 결정되는 탓에 조작이 가능했다.

원화는 NDF 시장에서 유동성이 가장 높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NDF 시장에서 움직이는 원화는 하루 평균 50억~60억달러다. 하지만 금리 산정 방식이 다르다. 하종수 외환은행 트레이딩 팀장은 "원화는 당일 장 마감 후 서울외국환중개소에서 집계, 고시하는 시장평균환율(MAR)을 적용하기 때문에 조작이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 역외선물환(NDF)

Non-Deliverable Forward. 국경 밖에서 이뤄지는 선물환 거래로 대표적인 파생상품이다. 계약 원금과 상관없이 약속했던 선물 환율과 만기 시 환율 간 차액만 정산한다. 신흥국 통화가 주로 거래 대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