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엊그제 금융통화위원회를 열어 내년 통화정책 목표를 기존 물가안정에서 경제 성장세 회복을 지원하는 쪽으로 전환키로 의결했다. 한은의 목표인 물가안정 기조를 유지하는 가운데 성장률 제고를 위해 돈을 풀겠다는 얘기다. 내년 경제성장률이 정부 예측으로도 고작 3.0%여서 저성장 고착화가 우려되고 있기에 한은의 정책선회는 부득이한 면이 없지 않다. 더구나 선진국들의 경쟁적인 양적완화와 통화 살포로 인한 원화가치 절상(환율 하락) 압력도 고려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은이 ‘성장 우선’을 공식 천명한 게 법적으로 타당한지는 의문이다. 한은법 어디에도 성장률 제고를 위해 통화정책을 써도 된다는 조항은 없다. 정부가 성장, 한은이 물가를 맡는 분업구조는 오랜 논쟁 끝에 타협한 한은 독립의 이론적 기초다. 한편으론 독립을 주장하고 다른 한편으론 성장을 우선한다면 이상하고 어색하다. 그렇게 하려면 한은법을 개정해야 마땅하다. 현재 국회에는 한은 목적에 성장과 일자리 확대를 추가한 한은법 개정안이 계류돼 있기도 하다.

한은은 미국 중앙은행(Fed)의 벤 버냉키 의장이 고용목표(실업률 6.5%)를 제시한 점도 의식했을 것이다. Fed 설치법에는 고용극대화, 안정적인 물가 등이 명시돼 있다. 필립스곡선이 말하듯이 물가안정과 고용확대는 동시에 달성할 수 없는 상충관계다. 이 모순된 목표를 추구하는 게 중앙은행의 운명이다. 더구나 중앙은행 폐지론자인 론 폴 의원(공화당)이 내년 하원 FRB감독소위원장을 맡는다. 적잖은 갈등을 예고하고 있다.

물가안정이 중앙은행의 목표로 부여된 것은 화폐가치 안정을 통해 부(富)의 왜곡을 막고 지속가능한 성장 기반을 유지하라는 취지다. 그동안 물가안정 역할도 만족스럽지 못한 한은이 성장까지 맡는다는 것은 과도한 목표 확장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새 정부를 의식한 것이라면 더 위험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