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철학 있는 정부를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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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외면하면 전체주의 우려
민간활력 살리는게 번영의 단추
조동근 < 명지대 교수·경제학, 하이에크소사이어티 회장 >
민간활력 살리는게 번영의 단추
조동근 < 명지대 교수·경제학, 하이에크소사이어티 회장 >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다시 펴본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독일이 나치즘에 빠진 이유를 사회심리학적으로 밝힌 불후의 명저다. 1914년 세계 1차대전에서 패한 뒤 독일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가혹한 전쟁 배상금, 실업자 홍수 등의 참혹한 위기를 맞는다. 하지만 사회·경제적 혼란만이 나치즘에 빠지게 한 요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보다 큰 권위에 순종하고 굴종하려는 내면적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자유’를 ‘시장’으로 바꾸면 많은 것을 시사한다. ‘경제민주화와 복지에의 귀속’도 따지고 보면 ‘자유와 시장’으로부터의 도피와 무관하지 않다. 그 기저에는 전체주의적 사고가 흐르고 있다. ‘이성’의 힘과 권위만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장’을 복원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개인 입장에서는 시장에서 생업의 기회를 찾고 자아를 실현하는 수고를 하느니 자신을 ‘국가의 품’에 안김으로써 만들어진 권위에 복종하는 편이 낫다.
‘양극화와 경제민주화 그리고 복지’는 이번 대선의 화두였다. 여기서 우리는 정직해질 필요가 있다. “정말 양극화인지, 언제부터 양극화였는지, 다른 나라의 사정은 어떤지, 또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한 정쟁을 뛰어넘는 냉정한 성찰이 있었는지 말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았다. 모두 믿어 의심치 않은 양극화였다. 경제적 논거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다 보니 양극화 해법을 놓고 고민할 이유도 없다. 누군가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면 된다. 치유는 ‘국가의 몫’으로 돌려졌다. 국가에 그런 능력이 있는지 숙고할 이유도 없다. 경제민주화와 보편적 복지는 국민이 ‘기댈 언덕’이었고 정치인에게는 ‘요술방망이’였다.
같은 방향을 향하던 여야의 속도경쟁이 대선일이 가까워지면서 차별화되기 시작했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재벌개혁에 경도된 경제민주화를 ‘공정경쟁’ 구축으로, 보편적 복지를 ‘맞춤형 선별적 복지’로 방향을 틀었다. 18대 대통령 선거 투표율이 기록적으로 높아진 것은, 유력한 제3후보가 없는 양자대결 구도이기도 했지만 ‘보수와 진보’ 간의 물러설 수 없는 대회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정치에서 가치의 충돌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선거가 끝난 만큼 선거 과정의 공약은 내려놓아야 한다. 약속을 파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박근혜 당선인은 당선 직후 ‘국민통합과 국민행복’을 강조했다. 하지만 역대 대통령 중에 통합을 말하지 않은 적은 없다. 통합은 구두선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일치하지 않는 것에 대해 동의하는, 즉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통합의 첫 단추다. 국민행복과 관련해서 ‘행복추진위원회’는 재고돼야 한다. 행복은 추구의 대상이지 추진의 대상일 수 없다. 행복은 자유권이지 국가의 의무 혹은 국민의 청구 대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줄푸세’는 박 당선인의 정책브랜드로 결코 손색이 없으며 시장경제를 견지하는 한 ‘줄푸세’는 존중돼야 한다.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줄이세’는 정부의 예산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민간의 활력과 창의를 저해하는 개입과 간섭을 줄이라는 것이다. ‘법치’와 ‘입법’은 다르다. 다수결로 통과된 것을 법으로 보면 정치와 법은 일체화된다. 특정계층의 이익을 보호하는 처분법이기 쉽다. 법치는 기득권이 아닌 약자를 보호하는 시스템이다.
민생은 시장과 싸운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국민은 눈물을 닦아주는 ‘감동의 정치’에 목말라 하지, 정치가 고단한 삶을 획기적으로 바꿔줄 것으로 믿지 않는다. 대선 방송토론에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는 “지난 5년간 서민은 뒷전이었고 부자와 재벌 이익이 우선이었다”고 했다. 그의 이분법적인 굴절된 경제관은 상당 정도 감표로 이어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재벌에게 넘어간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는 발언도 오류다. 시장의 권력은 소비자와 투자자의 선택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정치는 기술이 아니다.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견지하는 가치와 철학을 분명히 해야 한다. 개인도 ‘자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면 ‘익명의 권위’에 함몰된다. 스스로 돕는 개인만을 국가가 도울 수 있다.
조동근 < 명지대 교수·경제학, 하이에크소사이어티 회장 dkcho@mju.ac.kr >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자유’를 ‘시장’으로 바꾸면 많은 것을 시사한다. ‘경제민주화와 복지에의 귀속’도 따지고 보면 ‘자유와 시장’으로부터의 도피와 무관하지 않다. 그 기저에는 전체주의적 사고가 흐르고 있다. ‘이성’의 힘과 권위만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장’을 복원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개인 입장에서는 시장에서 생업의 기회를 찾고 자아를 실현하는 수고를 하느니 자신을 ‘국가의 품’에 안김으로써 만들어진 권위에 복종하는 편이 낫다.
‘양극화와 경제민주화 그리고 복지’는 이번 대선의 화두였다. 여기서 우리는 정직해질 필요가 있다. “정말 양극화인지, 언제부터 양극화였는지, 다른 나라의 사정은 어떤지, 또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한 정쟁을 뛰어넘는 냉정한 성찰이 있었는지 말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았다. 모두 믿어 의심치 않은 양극화였다. 경제적 논거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다 보니 양극화 해법을 놓고 고민할 이유도 없다. 누군가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면 된다. 치유는 ‘국가의 몫’으로 돌려졌다. 국가에 그런 능력이 있는지 숙고할 이유도 없다. 경제민주화와 보편적 복지는 국민이 ‘기댈 언덕’이었고 정치인에게는 ‘요술방망이’였다.
같은 방향을 향하던 여야의 속도경쟁이 대선일이 가까워지면서 차별화되기 시작했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재벌개혁에 경도된 경제민주화를 ‘공정경쟁’ 구축으로, 보편적 복지를 ‘맞춤형 선별적 복지’로 방향을 틀었다. 18대 대통령 선거 투표율이 기록적으로 높아진 것은, 유력한 제3후보가 없는 양자대결 구도이기도 했지만 ‘보수와 진보’ 간의 물러설 수 없는 대회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정치에서 가치의 충돌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선거가 끝난 만큼 선거 과정의 공약은 내려놓아야 한다. 약속을 파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박근혜 당선인은 당선 직후 ‘국민통합과 국민행복’을 강조했다. 하지만 역대 대통령 중에 통합을 말하지 않은 적은 없다. 통합은 구두선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일치하지 않는 것에 대해 동의하는, 즉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통합의 첫 단추다. 국민행복과 관련해서 ‘행복추진위원회’는 재고돼야 한다. 행복은 추구의 대상이지 추진의 대상일 수 없다. 행복은 자유권이지 국가의 의무 혹은 국민의 청구 대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줄푸세’는 박 당선인의 정책브랜드로 결코 손색이 없으며 시장경제를 견지하는 한 ‘줄푸세’는 존중돼야 한다.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줄이세’는 정부의 예산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민간의 활력과 창의를 저해하는 개입과 간섭을 줄이라는 것이다. ‘법치’와 ‘입법’은 다르다. 다수결로 통과된 것을 법으로 보면 정치와 법은 일체화된다. 특정계층의 이익을 보호하는 처분법이기 쉽다. 법치는 기득권이 아닌 약자를 보호하는 시스템이다.
민생은 시장과 싸운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국민은 눈물을 닦아주는 ‘감동의 정치’에 목말라 하지, 정치가 고단한 삶을 획기적으로 바꿔줄 것으로 믿지 않는다. 대선 방송토론에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는 “지난 5년간 서민은 뒷전이었고 부자와 재벌 이익이 우선이었다”고 했다. 그의 이분법적인 굴절된 경제관은 상당 정도 감표로 이어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재벌에게 넘어간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는 발언도 오류다. 시장의 권력은 소비자와 투자자의 선택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정치는 기술이 아니다.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견지하는 가치와 철학을 분명히 해야 한다. 개인도 ‘자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면 ‘익명의 권위’에 함몰된다. 스스로 돕는 개인만을 국가가 도울 수 있다.
조동근 < 명지대 교수·경제학, 하이에크소사이어티 회장 dkcho@mj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