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원주 치악산. 다리에는 24㎏짜리 모래주머니를 달았다. 산악을 뛰는 훈련이었다. 군장과 총을 메고 모래주머니까지 단 채 산을 달렸다.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입에선 단내가 났다. 입대 전 운동에는 자신이 있었다. ‘명동 두꺼비’라는 별명을 가진 나는 당시 80㎏의 당당한 체구에 무술 4단의 유단자(지금은 총 14단)였다. ‘군대쯤이야. 그까짓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특수훈련은 상상을 초월했다.

군에 입대한 것은 1968년 3월이었다. 그해 1월 무장공비 침투 사건으로 전국이 어수선하던 시기였다. 논산훈련소의 훈련은 어렵지 않았다. 황토벌에서의 각개전투도 쉽게 해냈다. 문제는 구타였다. 당시엔 구타가 있었다. 나처럼 많이 맞은 사람도 드물 듯하다. 논산에 입대하던 첫날 교관이 지나가는가 싶더니 갑자기 눈에서 불이 번쩍 튀었다. 다짜고짜 뺨을 맞은 것이다. “인상이 왜 이렇게 더럽냐”는 것이다. 그러더니 또 한 방이 날아왔다. 이번엔 “이름이 왜 그모양이냐”는 것이었다. ‘이국노’라는 이름이 ‘매국노’와 비슷하다는 게 이유였다.

훈련소의 고달픔은 ‘애교’에 불과했다. 춘천을 거쳐 자대인 중부전선 산꼭대기 고사포부대에 배치됐다. 부대생활에 겨우 익숙해지나 싶었는데 어느 날 중대장이 불렀다. “새로 창설되는 특수부대에 차출됐으니 출발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군용트럭을 타고 원주로 이동했다. 이때부터 또 다른 차원의 훈련이 시작됐다. 지금도 나는 그 특수부대의 성격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아마도 북한의 침투에 대항하기 위한 부대였던 듯하다. 운동깨나 하는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양광모 씨(합기도 4단·대검 수사관 역임), 이상규 씨(태권도 4단·용산경찰서 형사 역임), 우경식 씨(성동경찰서 형사 역임) 등이 한솥밥을 먹던 전우들이다. 계급장을 떼고 훈련이 시작됐다. 산악훈련과 더불어 극한상황에서의 생존훈련이 이어졌다. 이때 사람은 밥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산에는 먹을 게 무궁무진했다. 머루 달래 칡 개구리 뱀 등이 식량이었다. 계곡물은 생수 이상으로 깨끗하고 시원했다. 훈련을 마치니 인간병기로 변해 있었다.

그 훈련도 무사히 마치고 특수부대에 근무하다가 다시 중부전선 산꼭대기로 복귀하니 어느새 내 어깨에는 병장 계급장이 달려 있었다. 이등병 계급장이 ‘5만 촉광’에 빛날 정도로 눈부시다는데 병장 계급장의 자부심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느 날 중대장이 불렀다. “이 병장, 자네가 사회에서 웅변도 했고 운동도 많이 해서 담도 크니 이번에 군사령관님 방문 때 직접 브리핑을 하게.” 머릿속이 하얘졌다. ‘병장이 군사령관에게 브리핑을 하다니.’ 차트를 만들어 며칠 연습했다. 마침내 그날이 왔다. 헬리콥터가 내려앉더니 붉은 별판 수십 개가 보였다. 1군사령관(한신 장군)을 비롯해 군단장 사단장 등이 줄줄이 따라왔다. ‘적기 출현’에 대비한 방어태세를 브리핑하는 것이었다.

어지간히 담이 큰 나도 별들을 보니 긴장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한 사령관이 갑자기 “적기 출현”을 외치는 게 아닌가. 연습상황을 가정해 어떻게 할지를 답해보라는 것이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발사”를 외쳤다. 졸지에 ‘펑~펑~’ 소리와 함께 실제 포탄이 하늘을 향해 불을 뿜기 시작했다. 중대장이 사색이 돼 급히 중단시켰다. 어쩔줄 몰라하고 있던 나에게 한 사령관이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잘했다”는 것이다. 훈련을 실전처럼 하니 얼마나 잘한 것인가.

36개월10일간의 고된 사병생활이 사회에 나와 맨주먹으로 파이프 업체를 창업할 때 자신감을 갖는 원동력이 된 것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