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궁화호를 애용하는 고객이다. 1주일에 최소한 한 번 정도는 무궁화를 타고 서울역과 조치원역을 오간다. 조치원역에서 서울역까지는 1시간30분 정도 걸리는 거리. 굳이 KTX보다 무궁화호를 고집하는 이유는 KTX가 정차하는 오송역이나 대전역보다 조치원역이 가까이 있다는 현실적 이유에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도 한 몫 하지만, 그보단 무궁화호에서만 맛볼 수 있는 재미와 여유로움을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KTX 좌석은 특실이 아니고는 대체로 협소해 운신의 폭이 답답하기 이를 데 없으나, 무궁화호 좌석은 적당히 여유로워 다리를 뻗고 몸을 편안히 움직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더 더욱 신속함이 생명인 KTX는 빠른 속도로 달리기에 가까운 경치를 볼라치면 멀미를 느끼는 경우가 다반사지만, 무궁화호는 적당한 속도로 달리는 덕분에 스쳐 지나가는 창밖의 경치를 음미하며 기차 여행의 운치를 느끼기에 더없이 안성맞춤이다.

특별히 조치원역에서 전의역을 거쳐 천안역에 이르는 구간은 나지막하게 이어지는 산자락 사이로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를 멋지게 연출하는 들판이 아기자기하게 펼쳐져 있어 기차 여행의 맛과 멋을 한껏 더해주기에, 오르내리는 길 몸은 고단해도 마음은 한껏 여유로움을 안겨주곤 한다.

뿐이랴, 언제라도 사람 사는 냄새가 그득 배어나옴은 무궁화호만의 매력일 게다. 가까스로 입석표를 구해 기차에 오르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위해 기꺼이 자기 자리를 양보해주는 젊은이들의 넉넉한 마음을 만나는 즐거움도 있고, 옆자리의 낯 모르는 이와 음식도 나누어 먹고, 두런두런 세상살이 이야기도 나누며 아들 딸 자랑에 사위 며느리 흉에 적당히 수다 떠는 재미도 무궁화호만의 은근한 재미임이 분명하다.

한데 유독 연착(延着)과 연발(延發)을 일삼는 무궁화호 운행 시간만큼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봐줄 수가 없다. 열 번에 두어 번 지연(遲延)되는 것이 상례라면 어르신들 승하차 시간이 길어졌겠거니, 무언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겠거니, 충분히 이해해줄 수 있다. 하지만 열 번에 평균 일곱,여덟 번이나 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데야, 이건 분명 아량을 베풀 수준을 넘어선 듯하다.

특히 서울행의 경우 10~15분 정도 연착은 늘상 있는 일이고, 언젠가는 27분이나 뒤늦게 도착해 개인적으로 커다란 낭패를 본 일도 있다. 당시의 상황은 어른들께 송구한 정도에 머물러 다행이긴 했지만, 만일 절박한 생계를 위해 무궁화호에 올라탄 승객이었다면 얼마나 가슴 졸였을 것이며, 촌각을 다투는 중요한 약속을 눈앞에 둔 승객이었다면 얼마나 발을 동동 굴렀겠는가. 덕분에 무궁화호를 이용하는 날이면 목적지 도착 예정 시간보다 최소 30분 정도 여유를 두고 집을 나서는 버릇이 생겼다. 하지만 무궁화호가 자주 다니는 건 아니기에 너무 일찍 도착해 거리에서 서성이며 애매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자주 있음에랴.

오늘도 무궁화호에선 안내 방송을 통해 ‘KTX를 먼저 보내기 위해 잠시 정차하고 있다’, ‘선행(先行)열차와 거리 조정을 위해 서행(徐行)하고 있다’, ‘기차가 제 시간에 운행되지 못해 죄송하다’는 역무원의 목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하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정보통신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자랑하면서, 기차 시간 조정 하나 제대로 못해 승객으로 하여금 심리적 불쾌감까지 감내하도록 하는 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럴바엔 조치원~서울까지 1시간30분(물론 정차역 수에 따라 운행시간의 차이가 있지만)이란 ‘눈 가리고 아웅’식의 비현실적 운행시간표를 제시하지 말고, 현실적으로 지킬 수 있는 운행시간표를 면밀히 짜고, 기차는 약속시간을 지켜준다는 믿음에 걸맞게 운행시간 또한 착실히 지켜줄 것을 희망한다.

만일 다수의 승객들이 무궁화호의 상습적 지연에 무감각해지고 무뎌졌다면 이건 더욱 안타까운 일일 게다. 진정 생활 속 작은 약속의 의미를 소중히 생각하고 이를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면, 앞으로 명분 있는 큰 약속을 성실히 지키는 건 더욱 요원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새해엔 무궁화호를 애용하는 승객들의 작은 바람이 현실화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함인희 <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hih@ewha.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