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시장에서 은행권 쏠림 현상이 가속화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저금리 기조가 심화하면서 증권사의 퇴직연금 계정에도 은퇴자금이 꾸준히 유입되고 있다. 반면 2005년 12월 퇴직연금 제도가 선보인 뒤 60~70%까지 점유율을 차지했던 보험업계는 30% 선으로 밀렸다. 초저금리 시대가 이어지면서 은퇴시장의 한 축을 맡게 될 퇴직연금시장에서 보험업계가 설 땅을 잃어가고 있다.

○보험 지고 은행·증권 뜨고

퇴직연금 쟁탈전, 은행이 주도권 잡았다…보험, 예상밖 고전
지난 10월 기준 퇴직연금 적립액은 총 56조3069억원으로, 작년 같은 기간(39조1826억원) 대비 43.7% 급성장했다. 올 7월부터 퇴직연금 도입이 의무화되자 이를 앞두고 각 기업들이 앞다퉈 퇴직연금 사업자를 선정한 게 주요 배경이다. 이 과정에서 퇴직연금을 운용하는 금융회사 간 희비가 엇갈렸다.

생명·손해보험사들의 퇴직연금 적립금은 지난 10월 17조8305억원으로, 전체의 31.7%에 그쳤다. 작년 10월 33.9%에 비해 2.2%포인트 하락한 수치다. 시장 1위 자리를 줄곧 지켜온 삼성생명 점유율도 같은 기간 15.8%에서 14.2%로 위축됐다.

영업력이 강한 은행들의 퇴직연금 시장 점유율은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 전체 17개 은행의 비중은 작년 10월 48.4%에서 올해 49.9%로 확대됐다. 작년 퇴직연금 시장 ‘톱10’에 6곳을 포함시켰던 은행권은 올해 7곳으로 늘렸다. 산업은행이 퇴직연금 적립금을 1년간 8163억원(증가율 79.1%) 끌어모으면서 삼성화재를 제치고 새로 진입한 데 따른 결과다. 전체 2위인 국민은행 점유율은 9.4%로 작년보다 0.1%포인트 높아졌다.

증권사의 퇴직연금 점유율은 18.4%로 1년 전에 비해 0.6%포인트 높아졌다. 시중금리 하락으로 실적배당형 상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덕분이란 분석이다.

○“중소형사 10여곳 사업 철수”

퇴직연금 쟁탈전, 은행이 주도권 잡았다…보험, 예상밖 고전
경쟁력을 잃은 일부 금융사들은 퇴직연금 시장에서 아예 손을 떼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일정 적립금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관리비 부담만 커지는 데다 저금리 기조 속에서 역마진이 날 우려까지 있어서다.

지난 10월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이 1년 전보다 줄어든 곳은 메트라이프(806억원) 씨티은행(512억원) 동양증권(217억원) 한화손보(56억원) 동부생명(9억원) 현대라이프(7억원) 등 10여곳에 달한다. 적립금이 감소한 것은 신규 영업은 고사하고 기존 고객까지 이탈했다는 의미다. 해당 금융사들은 퇴직연금 사업 철수를 고려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한 중소형 보험사 관계자는 “퇴직연금 시장이 대형사 위주로 재편되고 있어 우리로선 수익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판단”이라며 “몇 달 전부터 사실상 신규 영업을 중단했다”고 말했다. 특히 손보사 중에서 적립금이 5000억원을 넘은 곳은 삼성화재(1조7662억원)와 LIG손보(1조962억원) 등 두 곳에 불과하다.

은행계열 보험·증권사의 설 자리도 좁은 편이다. 금융그룹 차원에서 은행 쪽에 영업력을 집중하고 있어서다. KDB생명 신한생명 IBK연금 하나대투증권 등이 대표적이다. 우리아비바생명과 하나HSBC 등은 처음부터 퇴직연금 시장에 진출하지 않았다.

○급여 사전확정형(DB)이 대세

금융권에 퇴직금을 맡긴 기업 중에선 확정급여(DB)형을 선택하는 비중이 가장 높은 것으로 집계됐다. DB형은 근로자가 은퇴할 때 받을 퇴직급여를 근무기간과 평균 임금에 따라 사전에 확정하는 방식이다. 금융사가 당초 약속대로 일정 수익률을 보장한다. 보험사의 DB형 비중은 84.5(생보사)~87.3%(손보사)에 달했다. 증권사 역시 75.8%로 높았다. 은행권의 DB형 가입 비중은 62.3%였다. 반면 퇴직연금 가입자가 직접 적립금을 운용하고 퇴직할 때 원금과 운용 수익을 받을 수 있는 확정기여(DC)형 가입자는 10~20%에 불과했다.

조재길 기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