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냉전 시대의 아이콘인 영국 첩보원 제임스 본드는 21세기 디지털 시대에도 통할까. 사상 최장수 영화 시리즈 ‘007 스카이폴’(26일 개봉·사진)은 이 질문에 명쾌하게 답한다. 아날로그형 첩보원 본드가 죽음의 위기를 극복하고 컴퓨터 천재 악당을 물리친다.

이 영화는 탄생 50주년을 맞은 23번째 007 시리즈다. 22편의 흥행 수입은 49억3000만달러(약 5조6000억원)에 달한다. ‘아메리칸 뷰티’의 샘 멘데스 감독은 전작들보다 리얼리티를 살리는 데 집중했다. 첩보원이 처한 비정한 현실을 맨몸 액션으로 돌파하는 것이다.

도입부는 본드 역 대니얼 크레이그와 악당이 달리는 기차 위에서 뒤엉켜 싸우는 신이다. 영국 첩보기관 MI6의 상관 M(주디 덴치)은 동료 요원에게 그들을 향해 발포하라고 명령한다. 본드는 최악의 경우 버려도 좋은 ‘퇴물’이란 얘기다. 애석하게도 악당이 아니라 본드가 총탄을 맞고 강에 떨어진다. 얼마 후 MI6 본부가 폭발하고 수장도 위기에 처한다. 천재 해커이자 전직 MI6 요원인 실바(하비에르 바르뎀)의 짓이다. 실바는 “영국, MI6, 다 구식이야”라고 내뱉는 21세기형 테러리스트다. 그도 본드와 비슷한 상황에서 버림받은 처지여서 MI6를 상대로 복수하고 있는 것.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본드는 실바와 대결한다.

최후의 격전지는 본드가 태어난 시골마을이다. 디지털기기가 무용지물인 외딴 곳이다. 본드와 실바는 구식 총과 폭탄으로 싸운다. 액션 신에 CG(컴퓨터그래픽)를 거의 사용하지 않아 무게감이 객석에 고스란히 전달된다.

이스탄불 시가에서 펼쳐지는 본드의 오토바이 추격전도 박진감이 넘친다. 오토바이를 탄 채 중앙 시장의 옥상과 지붕 위를 달리며 기왓장을 부수고 인파 속으로 뛰어든다. 시장의 잡상인과 상품이 쏟아져 아수라장이 된다. 액션의 긴장감이란 이처럼 주변 환경과 어우러질 때 커진다. 오토바이가 그저 빨리 달리는 데 그친다면 흡인력이 작다.

현실적인 액션과 스토리는 007 시리즈가 택한 고육책이다. 경쟁 첩보원 ‘본’(‘본 얼티메이텀’의 주인공)이나 ‘이든’(‘미션 임파서블’)이 고강도의 리얼리티를 보여준 까닭이다. 안이한 액션으로 한때 위기에 몰렸던 007 시리즈는 대니얼 크레이그를 앞세워 ‘퀀텀오브솔러스’ ‘카지노로얄’에 이어 ‘스카이폴’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