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난에 처한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이 맞을 최악의 위기는 회원국 사이에서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 정책 경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유럽 통합 전문가인 루트거 쿤하르트 유럽통합연구소장(사진)은 “유로존에 가장 필요한 것은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와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이 가졌던 합의적 리더십”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독일 본대 교수인 그는 “현재 유로존 위기라고 불리는 것은 단일통화 유로의 위기가 아니라 일부 국가들의 채무상환 위기일 뿐”이라고 진단했다. 쿤하르트 소장은 “유로는 유럽 통합을 위한 뛰어난 아이디어였다”며 “이번 위기를 똘똘 뭉쳐 견뎌낸다면 유로의 미래는 밝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로존 위기의 근본적 원인은.

“유로를 처음 설계할 때 유로존 리더들은 통화 통합만 구상했을 뿐 정치적 통합에 대해선 고려하지 않았다. 정책적 메커니즘을 만드는 데 소홀했다. 통화만 묶어놓고 정책이 따라주지 않으니 어려움이 커질 수밖에 없다.”

▷유로 자체의 한계는 아닐까.

“세계 경제 지형에서 유럽의 위치를 재설정하기 위해선 유로라는 단일통화가 꼭 필요했다. 2차 대전 직후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유럽 경제의 비중은 25%였지만 지금은 9%밖에 되지 않는다. 지금 한 나라 혼자 할 수 있는 것이란 거의 없다. 유로에 대한 불신과 공포가 시장을 지배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이번 위기로 유로존은 더 강하게 묶일 계기를 얻었다고 볼 수도 있다.”

▷재정 통합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 유로존 내부에서 더 큰 유럽 정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재정 통합은 바람직하며 실현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뭉뚱그려 생각할 것이 아니라 여러 부분으로 나눠 생각할 필요가 있다. 투명화는 어떻게 달성할 것인지, 공공지출에 대한 승인권은 어디에 줄 것인지, 정부 구성은 어떻게 단순화할 것인지, 연방 재정기관의 통합은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지 등 세부적인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가야 한다.”

▷현재 유럽연합(EU)이 제대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지적으로 들린다.

“EU는 매우 관료주의적이다. 정치 통합에 대한 실질적인 논의를 진전시켜야 한다. 최근 조제 마누엘 바호주 EU 집행위원장도 ‘EU연방’을 만들자는 제안을 했다. 연방정부가 유럽의 정책을 결정하고 효율적으로 조정하자는 것이다. 도발적인 제안이지만 회원국 간 긴밀한 협력을 위해선 궁극적으로 정치 통합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분열적 리더십이 아닌 합의적 리더십이 부각될 것이다.”

▷단일 통화로 독일만이 이득을 보고 있다는 시각도 있는데.

“철저히 잘못됐으며 매우 위험한 시각이다. 유로존 체제는 작은 국가일수록 더 큰 이득을 본다. 유로존에 속해 세계에서 정치적 발언권도 커지고 경제적 시장도 더 넓어졌기 때문이다. 독일같이 큰 나라들은 유로존 체제를 유지시켜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져야 한다.”

▷유로존 최악의 시나리오는 뭘까.

“각 국가에서 서로 다른 형식의 포퓰리즘 정책 경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서로 앞서 달리려고 경쟁할 수 있다. 이 경쟁의 마지막은 막다른 골목일 뿐이다. 금메달은 없다. 결국 모두 다치는 사고가 날 것이다. 공포라는 감정과 포퓰리즘이 위기의 빈 자리를 차지하도록 내버려둬선 안 된다. 현재 유로존 정치인들은 ‘성장’이란 단어를 현실적인 방안 없이 레토릭(정치적 수사)으로만 쓰고 있다. 포퓰리즘에 휩쓸리기 전에 ‘누구를 위한 성장인가’를 자문해야 한다.”

루트거 쿤하르트는 누구…유럽의회 자문 맡아

유럽 통합 연구에 정통한 독일의 사회학자다. 유럽통합연구소(ZEI) 소장과 유럽의회 자문역을 맡고 있다.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전 독일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을 담당했다. 미국 다트머스대, 스탠퍼드대에서 강의했으며 2004년 서울대 교환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저서 ‘유럽 통합의 위기’가 유명하다.


본(독일)=고은이 기자 kok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