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간의 화폐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여러가지 불편을 겪는다. 해외여행, 교역, 유학 때 시시각각 변하는 환율 때문에 환율에 관한 금융 상품도 등장했다. 하지만 다른 화폐의 사용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다. 일방적으로 경상수지 흑자 혹은 적자가 누적될 경우 변동환율이라는 시장의 자율 기능에 의해 교역 환경이 재조정될 수 있다. 또 금리정책 및 재정정책 등 의도된 정부 정책이 환율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국가 간 화폐의 상이함은 불편을 초래함과 동시에 효율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인위적인 협약과 정책에 의한 화폐 통합은 오랜 기간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었다. 물론 단일화폐 창출을 위해서는 장기간의 경제통합 단계를 거치며 통화정책을 관리해야 한다. 대표적인 예가 유로존(유로그룹)이다. 유럽 국가들이 자유무역지대를 창설한 이래 50년 동안의 경제통합을 거쳐 1999년 단일통화인 유로가 탄생했다. 하지만 유로 사용 10여년 만에 그리스, 아일랜드, 포르투갈 등 유로존 내 주요 국가들이 연쇄 재정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단일 국가 차원에서 재정위기 원인을 분석하면 방만한 재정운용, 부정부패 등을 지적할 수 있으나, 지역 차원에서의 문제점은 좀 더 근본적이다. 국가 간 실제 환율과 금리 격차가 큼에도 불구하고 단일통화를 쓰다보니 외부 수치로 드러나지 않는 문제가 누적되어 온 것이다. 각국 화폐가 달랐다면 국가의 사정이 반영돼 환율 조정이 일어났을 것이다.

게다가 한 국가의 화폐가치는 그 나라의 산업 구성비에 따라 고환율이 유리할 수도 있고, 저환율이 더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유로존 내 정부들은 자국 특성을 반영한 금리정책을 시행할 수 없으며, 경상수지 적자가 누적되어도 환율이 높아지지 않아 시장 기능에 의한 재조정을 받을 여지도 없다. 이런 비효율성은 유로존 내 국가들의 경제 성장 둔화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비유로존 EU 국가인 영국, 스웨덴 및 덴마크 등의 경제성장률과 비교하면 절반에도 못 미친다.

지금까지 구제금융 신청국 이외에도 스페인, 이탈리아로의 위기 확산 우려가 지속되는 등 유로존 재정위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로존 국가 정상들은 유로존 내 영구 구제기금인 유럽안정기구(ESM)와 신재정협약에 동의했다. 향후 신재정협약이 각국의 동의 하에 발효된다면, 공동체가 가입국 예산 감사 권한뿐만 아니라 사전 검열권을 포괄적으로 행사하는 것으로 이는 정치통합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또 협약이 발효되면 유로존 정상회의 및 유로존 재무장관회의가 공식 기구로서 발족하게 된다. ESM 운용을 통해 공동체 예산 재원을 확보하고 재정통합 과정을 지원하며, 역내 각국의 정부 지출과 역내 시민의 복지 수준 평준화 등에 관여할 수 있다. 이는 재정 부실이 예상되는 국가에 공동체가 선제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근거를 갖추는 것으로 실질적인 유럽연방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EU는 정치적으로 분리된 개별국가가 경제적으로 통합해 가는 제도적 과정을 원활히 이행해 왔다. 그러나 독일이 주도해 온 재정 통합 등의 정치적 부문에서는 십여 년 넘는 기간 동안 주요국의 확연한 의견 대립이 존재했다. 위기 상황이 재촉한 정치통합이 향후 유로화의 위상을 제고할 것인지, 또 EU 내 유로존과 비유로존으로 이원화된 구조를 원활히 통합해 나갈지, 무엇보다 제도 구축을 통해 유럽연방으로 귀결될 것인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현재 ESM 및 신재정협약은 몇몇 개별 국가의 승인이 불투명한 가운데 이를 주도했던 독일에서 위헌소송 끝에 조건부 합헌으로 결정났다. 그 결과 지난달 26일 독일정부는 유로존 17개 국가 중 마지막으로 ESM을 비준했다. 이에 따라 ESM이 최근 공식 출범했다. 향후 ESM이 본격적으로 운영돼 영구구제기금 운용 기관으로서 해법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된다. 위기의 한 중심에 놓인 EU 국가들과 정치 통합을 이끌 ‘정치 통화’ 유로. 이들은 현재 다음 단계 도약을 위한 구름판 앞에 집결한 상태다.

황기식 < 동아대 동북아국제대학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