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 대학들은 나름대로 전통적인 ‘대학 문화’가 있습니다. 개인 능력보다는 문화가 뿌리를 내려야 KAIST도 세계적인 대학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겁니다.”

지난 17일 밤 11시를 훌쩍 넘긴 야심한 시간, 서남표 KAIST 총장(76)을 대전의 총장 공관에서 만났다. 서 총장은 이날 오전 서울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자진 사퇴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서 총장은 부인 서영자 씨(76)와 함께 기자를 맞았다. 저녁엔 세계 10여개국에서 온 KAIST 총장 자문단을 맞아 공관에서 만찬을 곁들인 토론회를 가졌다고 했다.

○사람 내쫓는 전통 없애려 수모 참아

서 총장은 매사추세츠공대(MIT) 기계공학과 학과장, 미국과학재단(NSF) 공학담당 부총재 등을 지내며 거둔 개혁 성과를 인정받아 2006년 7월 KAIST 총장으로 금의환향했다. 국내서도 정년을 보장하는 교수들의 심사를 까다롭게 정비한 ‘테뉴어 제도’를 도입, 40여명의 교수를 탈락시키는 등 경쟁체제를 도입하면서 ‘대학 개혁 전도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렇지만 지난해 초 학생 4명과 교수 1명이 잇따라 자살하는 일이 발생하자 일방통행식 개혁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이사회, 교수협의회 등은 그의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날 자진사퇴 결정으로 서 총장은 임기를 1년반 가까이 남겨놓은 상태에서 중도 퇴진하게 됐다. 그는 의외로 담담했다.

그는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라면서도 “낙관적인 사람이어서 한번 지나가면 쉽게 잊어버린다”고 심정을 표현했다. 이어 “퇴진 요구가 나오면서 오래 전부터 언제 물러나는 게 좋을지 생각했고 주변 대다수가 신학기가 시작되는 내년 3월이 좋다고 해 그렇게 정한 것”이라며 “수모를 견디면서도 참아온 것은 사람을 함부로 쫓아내려는 학교의 나쁜 전통을 바로잡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소통이 타협의 의미면 개혁 못해

서 총장을 반대하는 사람이 늘어난 것은 2010년 연임 때부터다. 교수들은 물론 교육 당국도 그의 연임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소통 부족과 독선적 리더십 등 그를 따라다니는 나쁜 수식어들이 거론되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다. 그들을 설득하려는 노력을 왜 못한 것인지 궁금했다.

서 총장은 “학내 일부 교수들이 제일 불편해 한 것은 거버넌스(학교 운영)를 개혁하기 위해 도입한 테뉴어와 젊은 교수들이라도 학과장이 되면 전권을 주는 학과장 중심 제도였다”며 “테뉴어는 세계 저명 교수들의 외부 평가를 받아 인사위원회 등 시스템을 통해 정하는 것이고 학과장 제도도 세계 유수의 대학이 도입하고 있는 제도”라고 설명했다. 소통을 위해 총장이 나서 원칙을 깨고 타협하면 개혁을 이룰 수 없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독선적 리더십에 대한 지적에 대해서도 아쉬움을 나타냈다. 서 총장은 “오명 KAIST 이사장이 ‘한국에선 교수 한 사람이라도 나가게 하면 들고 일어나니 안 된다’며 지도력 부족 문제를 지적한 적이 있다”며 “이런 게 한국식 리더십이라면 개혁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오 이사장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목소리가 커졌다. 서 총장은 자진사퇴를 발표하면서 오 이사장의 동반 사퇴를 요구했다. 그는 “오 이사장은 지금까지 학교 발전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총장 거취에만 신경을 썼다”며 “지난 7월 여러 가지 합의 조건을 지킨다는 전제로 변호사 입회 아래 이사장에게 조건부 사의서를 써줬는데 이번에도 이런 조건을 빼놓고 사의서 내용만 외부에 알려 사태를 더 왜곡시켰다”며 동반 퇴진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5~10년 후 KAIST 더 발전할 것

그는 KAIST의 전망에 대해 낙관적으로 내다봤다. 서 총장은 “학생과 젊은 교수들의 자질은 MIT와 비교해도 크게 손색이 없고 굉장히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며 “총장으로 부임해 가장 잘한 일은 교육당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300여명의 젊은 교수들을 채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5~10년 후 이들이 주축이 돼 노벨상 등 큰 성과를 내면 여기서 나온 자신감으로 ‘KAIST 문화’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게 그의 기대다.

늦은 저녁 시작된 인터뷰는 새벽 1시쯤 끝났다. 비서실장이 서 총장의 다음날 일정을 걱정하는 말을 꺼낸 후에야 자리가 마무리됐다. 서 총장은 내년 3월 퇴임 후 곧바로 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그는 “한평생 놀아본 적이 없다”며 “미국에 가서 책도 쓰고, 이런저런 할 일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부인은 쉬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서 여사는 “예전보다는 좀 쉬면서 조용히 살고 싶은데…”라고 말했다.

대전=김태훈 기자 tae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