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년 전 일본에 인재파견업 도입한 '일자리 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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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하라 요시코 <템프스태프 사장>
이혼이 인생을 바꿨다
1960년대 보수적인 일본 떠나 英·호주 유학…창업 아이디어 얻어
"게이샤 소개소냐"비판에도…
'파견' 생소했던 기업들 외면했지만 매일 찾아가 신뢰 쌓고 단골 확보
직원들이여 회사를 차려라 !
"주어진 임무만큼 성장한다" 강조…아이디어만 좋으면 3000만엔 지원
베이비시터 업체 등 자회사 34개로
이혼이 인생을 바꿨다
1960년대 보수적인 일본 떠나 英·호주 유학…창업 아이디어 얻어
"게이샤 소개소냐"비판에도…
'파견' 생소했던 기업들 외면했지만 매일 찾아가 신뢰 쌓고 단골 확보
직원들이여 회사를 차려라 !
"주어진 임무만큼 성장한다" 강조…아이디어만 좋으면 3000만엔 지원
베이비시터 업체 등 자회사 34개로
위기는 여자를 강하게 만들었다. 영국과 호주를 돌면서 닥치는 대로 일하고 공부했다. 일본으로 돌아온 1973년, 그는 8평짜리 원룸에 사무실을 차렸다. 인재파견업체 템프스태프는 이렇게 시작됐다. 그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란 심정이었다고 했다.
39년 뒤 템프스태프는 연 매출 2200억엔(약 3조1150억원)을 올리는 종합인재컨설팅 기업으로 성장했다. 2010년 파이낸셜타임스는 템프스태프 창업자인 시노하라 요시코(篠原欣子·78) 사장을 ‘세계 최고 여성 최고경영자(CEO)’ 7위로 선정했다.
시노하라는 “파견업이 천직인가요”란 질문을 받을 때마다 고개를 젓는다. “죽을 각오로 시작한 일이라 중간에 그만두지 못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대신 이렇게 덧붙인다. “어떤 일이라도 열정을 쏟으면 애착이 생기죠. 저는 이 일에 모든 것을 던졌습니다. 자그마치 39년 동안이요.”
◆이혼이 이끈 창업
시노하라는 1934년 일본 요코하마시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중학생 때 학생회장을 맡을 정도로 활달한 성격이었다. 성적도 좋았다.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학교장의 추천으로 한 회사의 사무 보조로 입사했다. 하지만 젊은 시노하라에겐 뚜렷한 목표가 없었다. 주어진 일은 열심히 했지만, 결혼하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여자는 전업주부로 사는 것이 상식이던 시대였다.
지인의 소개로 만난 남자와 가정을 꾸렸지만, 결혼 생활은 1년을 채 넘기지 못했다. 이혼 뒤 돌아온 친정은 매몰찼다. 혼자된 딸을 데리고 있는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시노하라는 당장 먹고 살 걱정부터 해야 했다. 직업인으로서의 미래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프로 직업인이 될 만한 실력이 없다는 생각이 그를 괴롭혔다.
돌파구는 영어였다. 당시 일본엔 영어 인력을 필요로 하는 외국계 기업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다. 시노하라는 반년 분량의 생활비만 들고 영국으로 훌쩍 떠났다. 낮엔 영어학원에 다니고, 저녁엔 세탁소에서 일했다. 4년이 지나자 영어가 점점 입에 붙었다.
1971년 호주로 옮겨 시작한 회사 생활은 시노하라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가 일했던 호주 회사엔 여성 임원이 있었다. 경리부장도 여성이었다. 남성이 업무를 주도하는 일본과는 달랐다. 시노하라는 2년간의 호주 생활을 정리하면서 결심했다. “일본에서 여성의 일이란 남성 보조에 불과하다. 일자리를 구해봤자 중요한 업무는 맡지 못한다. 내 역량을 발휘할 회사가 없다면 내가 그런 곳을 만들자.”
창업 아이디어는 호주 회사에서 함께 일하던 파견 직원으로부터 얻었다. 호주엔 전문 인력들을 갖추고 원하는 회사에 일정 기간 직원을 파견하는 전문업체들이 있었다. 아직 일본엔 소개되지 않았던 업종이었다. “인재 파견업을 일본에 정착시키자!”
1973년 시노하라는 일본으로 돌아와 템프스태프란 이름의 인재파견업체를 차렸다. 임시직이란 뜻의 템퍼러리 스태프(temporary staff)를 줄인 말이었다. 그는 해외에서 번 돈을 모두 쏟아부었다.
◆“신뢰를 지켜라”
회사를 세웠으니 직원을 파견할 거래처를 확보해야 했다. 기업의 인사 담당자를 찾아갔지만 안내데스크에선 ‘담당자가 바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시노하라는 그 말이 거절의 뜻인지도 몰랐다.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기업을 찾았다.
당시 생소했던 인재파견시스템을 설명하는 데엔 난관이 많았다. ‘파견’이란 개념을 이해하는 기업들이 많지 않았던 탓이다. 일부 기업들은 템프스태프를 유령회사로 여겼다. 한참을 설명해도 “당신 회사는 게이샤(일본식 기생) 소개소 같은 곳이군요”란 대답이 돌아왔다.
시노하라는 믿음을 쌓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홀대를 참았다. 기업 인사 담당자가 이해할 때까지 반복해 설명했다. 인력 파견 의뢰가 들어오면 최선을 다해 응대했다. 회사의 적자는 저녁 때 영어회화교실을 운영하며 메웠다. 자신은 끼니를 굶을 때도 많았지만, 파견 직원의 월급은 절대 밀리지 않았다. 유능한 파견 직원과의 신뢰관계가 회사의 생명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창업 후 5년, 외국계 기업을 중심으로 템프스태프의 존재가 인식되기 시작했다. 파견 직원을 찾는 기업들의 요청이 많아졌다. 직원들도 하나 둘씩 늘었다. 시노하라가 아무리 바빠져도 잃지 않으려 했던 것은 ‘신뢰’란 원칙이었다. 한 직원이 파견 의뢰를 거절하는 것 같으면 펜으로 직원의 수화기를 톡톡 쳤다. ‘거절하지 마세요’란 신호였다. 기업들 사이에선 “템프스태프에 맡기면 까다로운 요구 조건도 어떻게든 맞춰준다”는 평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98년엔 파견 직원 명단 유출 사건이 일어났다. 시노하라는 ‘지금까지 쌓아온 신뢰를 잃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목표는 단순했다. 직원들을 지켜주는 것, 단골 거래처에 불안감을 느끼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시노하라는 즉각 영업을 중단하고 정보가 유출된 직원들의 집을 일일이 방문해 사과했다. 사내 직원들에겐 “회사가 문을 닫는 일이 생겨도 1년간 현재 수준과 똑같은 월급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동안 위기 상황에 대비해 1년분의 급여를 모아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직원들의 결속력은 더 강해졌다. 사건이 일어났던 해, 두 달간의 영업 정지에도 불구하고 회사의 매출은 전년 대비 6.2% 증가한 713억엔을 기록했다.
◆“살아남는 힘을 주겠다”
2000년 시노하라는 사내 창업제도를 도입했다. 모든 직원은 창업 아이디어를 낼 수 있었다. 시노하라는 이를 직접 검토, 직원과 면담한 뒤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즉석에서 3000만엔의 착수 자금을 건넸다. 새 회사의 리더는 물론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직접 맡았다.
사업 확장에도 도움이 되지만, 진짜 목적은 직원들이 활약할 장(場)을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시노하라는 어느 날 한 직원이 회사일을 따분하게 여긴다는 것을 눈치챘다. 직원에게 하고 싶은 일을 묻자 그는 “지금 관리 중인 아웃소싱 사업부를 따로 맡아 키워보고 싶다”고 했다. 다음 날 바로 승인했다. “사람은 임무가 주어지는 만큼 성장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스스로 회사를 키워오면서 얻은 교훈이었다. 직원들도 자신과 같은 경험을 쌓길 바랐다.
이렇게 생긴 대표적인 회사가 베이비시터 파견전문업체 ‘템프스태프 위시’다. 한 직원이 양육 때문에 일을 할 수 없게 된 파견사원을 도울 방법을 고민하면서 시작됐다. 2006년엔 장애인 취업에 도움을 주는 ‘템프스태프 프런티어’가 출범했다. 간병 사업 전문 ‘케어 템프’, 중년 직원의 재취업을 지원하는 ‘템프스태프 전직 서포트’도 설립했다. 자회사는 일본 34개사, 해외 13개사로 늘어났다.
시노하라는 “직원들에게 살아남는 힘을 주고 싶다”고 말한다. 회사가 망하거나 직원들이 회사를 떠나게 될 때 의지가 될 수 있는 경험을 주겠다는 것이다. 한 자회사가 위기에 빠졌을 때 그가 한 말은 “오히려 잘 됐다”였다. 그는 “위기를 극복하면서 얻은 경험으로 성숙해질 수 있다”며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죽을 힘을 다해 해낸다는 각오”라고 강조했다.
고은이 기자 kok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