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황으로 미국은 장기간 20% 내외의 실업과 마이너스 10% 내외의 성장이라는 극심한 불황을 겪었고 독일 등 유럽에도 파급됐다. 이런 참혹한 경험을 한 인류는 구세주로 여길 만큼 케인스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그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는 많다. 미국, 영국, 독일 등 많은 국가들이 완전고용법 또는 경제안정법을 제정했다. 성장과 안정을 위한 우리나라 헌법 제119조 2항도 케인스의 영향이다. 루스벨트에서 닉슨에 이르기까지 모두 케인스의 넥타이를 맨 정치가들이었다. 케인스 사상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증거로 1930년대 대공황의 사례를 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원인을 유효수요의 부족으로 보면서 루스벨트는 케인스의 처방에 해당되는 뉴딜정책으로 대공황을 극복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공황은 유효수요의 부족에서 야기된 것이 아니라 방만한 통화팽창의 필연적 결과였다는 것, 그리고 뉴딜정책은 오히려 불황을 대공황으로 악화시켰다는 것이 신(新)경제사학의 확고한 인식이다.

세계의 이목(耳目)은 케인스에게 집중했지만 그의 사상은 기대만큼 성과가 없었다. 정부 지출만 늘리면 실업과 불황에서 경제를 살려낼 수 있다고 장담하던 그의 사상 때문에 1950년대 이후 유례없는 세계적 인플레이션과 불가피한 실업을 겪어야 했다. 결국 1970년대 만연한 스태그플레이션으로 그의 사상은 종지부를 찍었다. 케인스의 사상이 남겨놓은 것은 방만한 정부 지출로 인한 나라의 빚더미뿐이었다.

그의 사상의 치명적인 결함은 거시경제학의 방법 그 자체이다. 총합변수를 가지고는 경기변동의 원인을 알 수 없다. 단순히 정부지출의 증가가 고용을 증대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을 비롯해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금융위기의 여파를 극복하기 위해 빚을 내서까지 정부지출을 늘렸지만 불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정부지출을 줄이고 규제를 개혁한 스웨덴, 독일, 스위스 그리고 에스토니아 등은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했다.

흥미로운 것은 케인스의 경제학이 현실에서 과학의 논리를 갖추지 못했음에도 경제학자나 정부, 관료들이 매력을 느낀다는 점이다. 그것은 국가라면 무엇인가를 할 수 있으리라는 그들의 믿음에 토대를 두고 있고, 또 거시변수는 측정 가능하며 그래서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일 터이다. 그러나 그 대가는 실업과 인플레이션이다. 유감스럽지만, 케인스가 없었다면 경제학이 더 풍요로웠을 것이고 세계는 더욱 번영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