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탈로그 하나 들고 전시회 누비던 청년, 60개국에 '꿈'을 심었다
1990년대 초 독일 뮌헨. 세계 최대 건설기계전인 바우마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곳에 큰 키에 깡마른 체구, 까무잡잡한 얼굴을 한 30대 중반의 한국 청년이 들어섰다. 한손에는 카탈로그를 잔뜩 들고 있었다. 영락없이 지하철역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는 아르바이트 학생 모습이었다. 그는 가장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에 자리잡은 뒤 이를 돌렸다. “한국의 대모입니다. 우리 회사 소개서를 한번 읽어봐 주세요.” 그가 외치면 그 옆에 있는 독일 유학생이 영어나 독일어로 복창했다.

그는 전시부스도 없이 카탈로그만 들고 당돌하게 세계적인 전시회에 나간 것이다. 밤에는 유학생의 옥탑방에서 잔 뒤 햄버거로 아침을 때우고 전시장 문을 열자마자 가장 먼저 입장해 목좋은 곳에 자리잡았다. 돈이 없어 자사제품을 출품할 부스를 구할 엄두를 내지 못해 카탈로그만으로 제품을 알린 것이다. 그것도 한글어 버전이었다. 그 위에 영어 설명을 덕지덕지 붙였다.

그로부터 약 20년이 지난 지금 대모엔지니어링은 60개국에 건설기계 부착장비를 연간 4000만달러 수출하는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당시 카탈로그를 나눠준 사람은 이 회사의 창업자 이원해 회장(56)이다. 그동안 어떻게 성장한 것일까.

경기도 시화산업단지 군자천변에 있는 한 공장의 5층 높이 벽면에는 거대한 변신로봇 ‘트랜스포머’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회사가 대모엔지니어링이다. 상단에는 셰어(shear), 왼손은 브레이커(breaker), 오른손은 크러셔(crusher), 다리는 콤팩터(compactor)로 구성돼 있다. 이들 장비는 굴삭기 끝에 달아서 쓰는 부착장비(어태치먼트;attachment)다.

크러셔는 건물을 부술 때, 브레이커는 암반을 뚫을 때, 쉐어는 철구조물을 해체할 때 쓰는 장비다. 콤팩터는 도로공사 후 빈면을 평평하게 다지는 데 사용된다. 생산제품을 한눈에 보여주기 위한 그림이다.

트랜스포머처럼 이 회사는 꾸준히 변신해 몸집을 키우며 성장해왔다. 작년 매출은 607억원으로 2010년 421억원에 비해 44% 늘었다. 이 중 수출이 약 4000만달러로 전체 매출의 약 70%를 차지한다. 수출지역은 아시아가 약 40%, 중동 20%, 미주 18%, 러시아 10% 등이다. 이 밖에 유럽 중국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등에도 선적된다. 이 회사의 성장 요인은 몇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안 되면 되게 하라’는 도전정신이다. 청주에서 9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이 회장의 집안은 원래 유복했으나 부친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몰락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 진학이 곤란해지자 구두통을 만들어 팔기 위해 나무를 구해다 톱질하고 대패로 깎기도 했다.

다행히 장학금을 받아 중학교를 다녔으나 이번엔 고등학교가 문제였다. 학비없는 곳을 찾다가 서울 항동의 유한공고를 알게 됐다. 입학금은 내야 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했던 서울의 진학사를 찾아가 입학금 절반을 받아내고 나머지 절반을 자신이 다니던 중학교 교장 선생님에게서 빌렸다.

이번엔 서울에서의 생활비가 문제였다.

군위탁 장학생을 지원했다. 장기 복무를 전제로 생활비를 보조받을 수 있었다. 6년간 군복무 후 육군 중사로 제대한 뒤 수산무역에 입사해 중장비 부품 수입 업무를 담당했다. 이게 그의 사업 방향을 결정했다. 공부에 대한 갈증은 야간 대학(숭실대 전자과)을 통해 해결했다. 주경야독을 통해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1988년 대모엔지니어링을 창업했다.

카탈로그 하나 들고 전시회 누비던 청년, 60개국에 '꿈'을 심었다
서울 신도림동의 30평 임차공장에서 4명의 직원으로 시작했다. 이듬해 고척동으로 이전하면서 법인으로 전환했다.

이 회장은 처음부터 해외시장을 겨냥했다. 창업 직후 세계 최대 건설기계전시회인 뮌헨 바우마전시회를 참관한 뒤 수많은 바이어들이 몰린다는 것을 알았다. 전시회에 출품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돈이 없어 두 번째 참관할 때 카탈로그를 들고 나간 것이다. 발로 뛰며 제품과 회사를 알렸다.

둘째, 대기업과의 상생이다. 이 회사가 수출에 날개를 단 것은 현대중공업과 협력체제를 갖추면서부터였다. 이때부터 ‘행복한 동행’이 이어졌다. 현대중공업은 국내외 전시회에 대모엔지니어링의 브레이커 등을 함께 전시하며 바이어들과 상담할 기회를 만들어줬다. 현대중공업으로서는 이들 어태치먼트를 통해 굴삭기 용도를 더욱 넓힐 수 있었다. 윈윈이요, 동반성장이었다.

셋째, 다양한 제품 개발이다. 브레이커를 국산화한 대모엔지니어링은 그 뒤 콘크리트 크러셔, 셰어 등을 잇따라 개발했다. 이 회장은 고등학교 때 기계, 대학 때 전자를 전공해 메커트로닉스제품을 제조할 능력을 갖춘 데다 손재주도 있었다. 사내연구소를 설립하고 산업기술대 등과 산학협력을 통해 신제품을 속속 선보였다.

이 회사는 중진공의 월드클래스 기업, 기업은행의 수출강소기업, 산업은행의 글로벌스타기업으로 각각 인증받았다. 미국과 중국 유럽에 해외법인을 설립하는 한편 60여개국에 현지 딜러를 두고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매년 해외 주요전시회에 대여섯 차례 출품한다.

이 회장의 꿈은 2020년대에 건설부착장비업계에서 세계 3대 메이커로 도약하는 것이다. 그는 “현재는 세계시장에서 15위권에 머물고 있지만 꾸준히 기술을 개발하고 해외마케팅을 강화하면 이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연구·개발과 대기업과의 동행을 두바퀴로, 도전정신을 엔진으로 삼아 달리고 있다.

카탈로그 하나 들고 전시회 누비던 청년, 60개국에 '꿈'을 심었다

"해외견문 넓히라고 유한공고 후배들 해외연수 보내죠"

이원해 대모엔지니어링 회장 방에는 고 유일한 박사 흉상이 놓여 있다. 유한양행과 학교재단 유한재단을 설립한 유 박사는 기업경영목표가 사회봉사에 있다며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도 했다.

유 박사는 이 회장이 가장 존경하는 기업인이다. 자신이 유한공고에서 무상교육을 받은 게 바로 유 박사 덕분이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현재 유한공고 총동문회장과 유한동문장학재단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는 동문들과 힘을 합쳐 해마다 20명 안팎의 학생을 중국과 미국에 연수를 보낸다. 글로벌 시대에 해외경험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벌써 4년째다.

중국의 경우 15명이 4주간 장쑤성 고교에서 문화를 체험한다. 미국의 경우 애틀랜타 국제학교에서 3주간 기초생활영어 과정을 듣고 캘리포니아를 거쳐 귀국한다. 이 과정에서 장애인에 대한 봉사도 한다.

이 회장은 유 박사가 가르쳤던 교훈도 늘 가슴에 새긴다. ‘사회에 쓸모있는 기술로 승부하라’는 내용이다. 아울러 젊은이들이 좀더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지라고 주문한다. 그는 “무엇 때문에 ‘안 돼’라고 말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풀 수 있는지 생각하라”고 강조했다.

시화=김낙훈 중기전문기자 n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