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1년 5월 미국 뉴욕에 도착한 프랑스 판사 알렉시 드 토크빌은 신천지를 목격했다. 중세 봉건주의 잔재가 남아 있던 유럽과 달리 활기와 자유분방함이 넘쳐나는 신대륙의 에너지에 그는 감탄했다. 미국의 교도행정을 연구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넌 토크빌은 이듬해 2월까지 북미대륙 곳곳을 여행하며 ‘떠오르는 나라’ 미국의 속내를 호기심 가득 들여다봤다. 그 결과물이 그의 대표작 ‘미국의 민주주의’다.

토크빌은 미국인들의 평등함(equality of condition)에 놀랐다. 그 바탕엔 귀족과 하인으로 나눠지지 않은 무계급성(classlessness)이 있었다. 물질적 풍요를 종교적 의무로 여기는 청교도 정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개척 정신과 실용주의 정신은 미국 경제를 빠르게 일으켜 세웠다.

1776년 독립을 선언한 미국이 100여년 만에 영국을 제치고 최강대국으로 떠오른 배경이다. 벤저민 프리드먼 하버드대 교수에 따르면 1896년 14%였던 미국의 실업률은 1901년 4%로 떨어졌고, 1918년엔 1.4%까지 내려갔다. 의지와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완전고용의 시대였다.

토크빌이 지금 미국을 다시 방문한다면 어떤 느낌을 받을까. 아마 무척이나 실망할 것 같다. 19세기와 20세기 초 미국을 상징했던 역동성과 근면성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신흥국에 경제 주도권을 뺏긴 미국은 남 탓하기 바쁘다.

미트 롬니 공화당 대통령 후보는 “환율을 조작하는 중국이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훔쳐가고 있다”며 유세 현장마다 목소리를 높인다. 혁신의 상징이던 애플은 특허권을 앞세워 경쟁자들을 윽박지르고 있다. ‘네 탓’엔 핑계도 많다. 미국 하원은 중국의 통신장비회사인 화웨이와 휴대폰제조사 ZTE의 미국 사업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통신 시스템에 접근해 미국의 안보를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이 이유다.

미국인들의 위기의식은 경제학계에서도 감지된다. 생산성 분야 전문가인 로버트 고든 노스웨스턴대 교수는 최근 발표한 논문에서 앞으로 50년 뒤 미국의 성장률이 0.2%까지 떨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인구구조 변화에 따른 근로시간 감소, 소득의 양극화, 세계화에 따른 일자리 증발, 고등교육을 받은 양질의 노동력 감소, 환경규제, 정부와 민간의 과다한 부채 등을 미국 경제의 발목을 잡는 6대 원인으로 꼽았다.

고든 교수의 주장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이민자를 언급한 대목이다. 부실한 교육과 중산층의 일자리 감소가 히스패닉(중남미계 이주민)과 흑인 비중이 높아진 탓이란 것이다. 논문을 읽어보면 백인 중심의 국수주의 냄새가 짙게 난다. 그럼에도 그의 지적을 가볍게 볼 수 없는 것은 미국 특유의 개척과 도전정신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을 정확히 짚고 있기 때문이다. 토크빌이 감탄했던 미국인들의 정신, 즉 노동을 신성하게 여기는 근면성이 약해졌다는 얘기다.

고든 교수 논문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이 처한 현실을 생각하게 된다. 근면성과 도전정신에 관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한국인들이다. 하지만 미국 지도자들의 ‘네 탓’ 주장을 비웃을 수만은 없는 것이 우리의 현 주소다. 스스로 뭔가 만들어내겠다는 의지보다는 ‘힘 센 놈’ 때리기가 유행이다.

토크빌이 1960~1970년대 한국을 찾았다가 지금 인천공항에 내린다면 어떤 인상을 받을지 궁금해진다. 180여년 만에 둘러본 미국과 40여년 만에 다시 온 한국이 혹시 비슷해 보이진 않을까.

박해영 국제부 차장 bon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