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鏡虛) 성우(惺牛)는 이미 전설 속의 사람이 됐다. 경허가 입적한 지 꼭 100년이 지났을 뿐인데 그는 우리에게 아득한 옛날 사람처럼 느껴진다. 경허는 상식을 벗어던진 무애행의 극치를 보이다가 만년에는 저 북단의 오지인 삼수갑산으로 들어가 행적이 묘연해졌다. 그는 근세 한국 선(禪)의 중흥조로 높이 추숭되고 있는 터라 그가 사라지고 없는 자리에서 그를 둘러싼 신비한 소문이 날이 갈수록 무성해졌다.

경허가 불교를 공부하는 영남 예천의 선비에게 보낸 편지를 소개한다. 완고한 도학의 고장인 예천의 선비가 불교를 좋아하고 경허와 사귀었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경허집(鏡虛集)》중 ‘장상사와 김석두에게 올리는 편지(上張上舍金石頭書)’다.

‘지난달 모일에 실상사 약수암의 승려 편에 서찰 한 통을 부쳤는데, 받아 보셨는지요. 지금 용문으로 가는 인편이 있기에 몇 자 적어서 부칩니다. 유가에서는 “군자는 자기를 미루어 갈 뿐이니, 자기에 만족해 밖에서 바라고 기다림이 없는 것을 덕이라 한다”고 했으니, 이것은 선비들이 늘 하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불교 공부에 적용해 보면 그 이치가 매우 많고 큽니다. 대개 생사와 열반, 범성(凡聖)과 선악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참선, 송경(誦經), 기도, 염불 등 수행까지도 모두 밖의 것이 아님이 없으니, 자기 밖의 것이라면 이미 옳지 않습니다. 동정운위(動靜云爲)의 모든 행위에 자기도 모르게 외물(外物)에 얽매이고 이끌리는 것이 마치 교외의 우산(牛山)과 같습니다.’

편지는 이렇게 이어진다.

‘조공(肇公)이 이르기를 “지인(至人)은 자기가 없다”고 했는데, 이는 교가(敎家)에서 너무나 많이 써서 싫증이 나는 말이지만 도리어 맛이 있습니다. 그래서 옛 스님이 이르기를 “지극히 반조(返照)해 자신이 의지할 데가 없으면 온 몸이 그대로 대도(大道)에 합한다”고 했고, 또 이르기를 “거울을 깨고 오면 그대와 서로 대면해 보리라”고 했던 것입니다. 대저 일점 신령한 마음은 그 자체가 걸림 없이 툭 트이고 아주 말쑥해 본래 갖추어진 바탕에 터럭만한 것도 아무 흔적도 없습니다.’

상대방이 선비이기 때문에 경허는 유가(儒家)의 말을 빌려서 불교의 이치를 설명했다. 군자는 자기에게 만족하고 밖으로 바라는 것이 없다고 했는데, 불법에서는 자기마저 없어야 한다고 했다. 우산은 전국시대 제나라 도성 교외의 산으로 사람의 본성에 비유된다. 우산은 원래 아름다운 숲이 우거졌었는데, 나무꾼들이 베어가고 소와 양들이 싹을 뜯어먹다 보니 민둥산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이 사물에 이끌려 손상되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조공은 동진 때 승려 승조(384~413)를 가리킨다. 불교의 깨달음은 무아(無我)를 깨닫는 것이다. 본래 나라고 할 나가 없음을 깨달으면 사물과 나의 구별이 없어져 마음이 까닭 없이 괴로워하고 허덕일 일이 아주 없어진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불교를 이단으로 배척했기 때문에, 추사 김정희와 같은 예외가 아주 없진 않지만 불교에 조예가 있는 학자를 찾아보기 어렵다.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사서삼경을 읽는 사람은 불서를 애써 기피하고,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은 유가의 사상을 경시하는 공부의 편향성이 남아 있다. 웬만한 학자라면 유불을 대강은 섭렵하는 이웃 나라 일본과 비교해 보면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주자학이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으로 일정 부분 남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주자학을 신념으로 받아들이고 종교인의 정신으로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다. 불교인이 주자학을 싫어하고 자기 신앙에 철저해도 나무랄 수 없다. 그렇지만 학문하고 연구하는 학자라면, 자기 학문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다른 학문을 알려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명색이 학자가 어느 사상의 신도가 되어 무턱대고 다른 사상을 배척해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이상하 <한국고전번역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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