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의 친고죄(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 사법처리가 가능한 죄) 규정을 폐지해야 한다는 데 법원 판사 및 학계에서도 동의한다는 의견을 냈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최근 성범죄 친고죄를 없애야 한다는 생각을 드러낸 데 이어 일선에서도 유사한 의견을 낸 것이라 주목된다.

25일 대법원 형사법연구회와 한국형사법학회에 따르면 지난 22일 ‘각국의 양형제도’라는 주제로 열린 공동학술대회에 참가한 현직 형사재판 담당 판사들과 형사법 전공 학자들은 “성범죄에 대한 각국의 양형제도 및 성범죄로 발생하는 사회적 폐해를 고려할 때 친고죄 규정을 폐지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모았다.

대회에 참석한 한 교수는 “성범죄를 친고죄로 보는 나라는 전세계에서 한국과 일본뿐”이라고 지적한 뒤 “성범죄는 단순한 개인 자유 침해가 아닌 인간의 존엄을 침해하는 범죄로 봐야 하므로, 친고죄 규정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동안 친고죄 규정으로 보호하려 했던 피해자 명예 문제 등은 조사 및 재판절차 개선을 통해 해결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교수도 “성범죄가 친고죄로 돼 있어 성범죄 신고를 꺼리는 분위기가 있었고, 형사사법기관에 대한 신뢰에도 악영향을 미쳤다”며 역시 친고죄 폐지를 주장했다.

참가자들은 성범죄 피해자와 가해자가 합의한 경우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등 형을 낮추는 요인(감경요소)으로 여겨야 하는지를 놓고도 토론을 벌였다. 학계와 법관 모두 합의를 형 결정에 있어 결정적인 요소로 봐서는 안 된다는 데 대체로 동의했다. 학계에서는 합의를 감경요소로 두더라도 범죄자가 진지하게 반성했는지, 합의하기 위해 노력했고 충분한 보상을 했는지, 합의를 위해 피해자를 협박하지 않았는지 등을 엄격히 확인한 후에 적용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13세 미만 아동 대상 성범죄의 경우 합의 여부를 반영해선 안 된다는 주장도 나왔다. 한 교수는 “독일이나 스위스의 경우 피해자와의 합의가 아닌, 피해 회복을 위한 가해자의 노력을 양형에 반영하는 것”이라며 해외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다.

한 판사는 “미국의 경우 피해자와의 합의나 합의금 공탁은 양형 고려 사안이 아니고, 피해자 치료비 등 손해배상은 법원이 명령하도록 돼 있다”고 말했으며, 또 다른 판사는 “그동안 합의 여부를 중시했던 건 성범죄가 친고죄였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지난달 열린 전국 형사법관포럼에서도 유사한 의견이 나왔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