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싸이가 대세다. 말춤 하나로 세계적인 유명인이 됐다. 하지만 한국 남자들에게 싸이는 군대를 두 번 갔다온 남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나도 그랬다. 원래 해병대에 가고 싶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해병대는 들어가기 매우 힘든 곳이었다. 너무 가고 싶어 머리도 미리 해병대식으로 밀었다. 그리고 신체검사를 받았다.

검사 당일 하필 몸에 옴이 났다. 볼 것도 없이 탈락이었다. 한 달 후 다시 머리를 바짝 밀었다. 해병대에 또 지원했다. 이번엔 합격. 훈련소 입소 선서를 하고 내무반 배치를 받았다. 그런데 내무반에 들어서자 불호령이 떨어졌다. 한 달 전 생긴 옴이 완전히 낫지 않아 입소가 취소된 것. 두 번이나 밀어버린 머리가 다 민망했다. 이후 피부병이 나은 후에 다시 육군으로 입대했으니, 나도 싸이처럼 군대 두 번 갔다 왔다고 하면 너무 허풍일까.

1972년 1월4일. 22세에 ‘진짜’ 입대를 했다. 논산 육군훈련소 28연대. 40년 전 대한민국은 배고팠다. 군대는 더 배고팠다. 고된 훈련을 하고 온 훈련생들에게 훈련소의 배식은 너무 적었다. 밥도 적고 국에 건더기도 적고. 그런데 유독 식사 묵념할 때마다 옆 사람의 배식은 왜 그리 많아 보이던지.

40년 전 나는 겁이 많았다. 군대에 돈을 가지고 가면 맞아 죽는 줄 알았다. 그래서 주머니에 있던 돈마저 모두 내놓고 들어갔다. 그런데 돈이 필요했다. 속옷에 돈을 몰래 가지고 온 몇몇 동기는 PX에서 빵을 사 먹었다. 하얀 크림빵이 정말 맛있어 보였다. 혼자 먹겠다며 화장실로 향하던 동기가 얼마나 얄밉던지.

첫 월급이 600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월급을 들고 PX로 곧장 달려갔다. 하얀 크림빵을 10개는 샀던 것 같다. 다른 사람에게 나눠줄 여유가 없었다. 나 역시 누가 뺏어 먹을까 두려워 빵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남을 생각하기에는 서로가 너무 배고팠다.

운이 좋은 건지 부대에서 동네 형님을 만났다. 의무병 병장이었다. 어느 날 그 형님이 나를 몰래 부르더니 양동이 가득 밥과 함께 김치 한 덩이를 주었다. 귀신에 홀린 듯 먹었다. 배고픔에 서로 삭막했던 동기들 사이에서, 먹을 것을 나눠주던 병장 형님이 얼마나 멋지던지 영웅이 따로 없었다. 그때 생각을 하게 됐다. ‘아, 내 배가 불러야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겠다.’ 그래서 결심했다. 나도 여유 있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내가 사업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 주위 사람들을 여유롭게 살게해주고 싶은 마음, 특히 나의 직원들, 그리고 대한민국을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 미력하나마 힘을 다하는 것…. 이 모두가 아마 군대 경험이 바탕이 되지 않았나 싶다.

훈련소를 마치고 수송대대를 거쳐 보안교육대에서 1974년 10월16일 군생활을 마쳤다. 34개월 동안 세 군데에서 군 생활을 하며 겁 많던 나는 ‘뚝심’을 기를 수 있었다. 군대는 내 사업의 초석을 세운 곳이기도 하다. 한 후임병이 내게 맞을 만한 사업을 소개해줬다. 그게 인연이 돼 사업가 김영식이 태어날 수 있었다.

지난 8월 포천에 있는 한 군부대에 다녀왔다. 천호식품과 자매결연이 있었다. 40년 전 내가 있던 군대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가장 놀랐던 것은 내무반. 침대가 각각 일정 간격 떨어져 있었다. 동기끼리 같은 내무반 생활도 하고 있었다. 이런 변화에 보답이라도 하듯 우리 장병의 군사력도 상당해 보였다. 젊은 장병들을 보고 있자니 국방을 믿고 맡겨도 되겠다 싶었다.

인간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한다. 춥고 혹독한 시련도 시간이 지나면 아름다운 추억이 된다. 내게 군대가 그렇다. 배고프고 혹독한 시간이었지만 현재의 행복을 가장 빛나게 해주는 추억이다. 생각해보라. 군시절만큼 언제 또 그렇게 일상의 행복이 고맙고 가치있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