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표 전자회사의 공정기기 부문 사업본부장으로 부임한 전재진 상무는 유명 MBA 출신 강 과장에게 신상품 기획안을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약속된 두 달이 한참 지나서 강 과장이 가져온 것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석 장짜리 보고서.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던 전 상무는 깜짝 놀랐다. 대부분 작년 본사 마케팅 회의에서 기각됐던 내용을 그대로 재활용한 것이 아닌가.


강 과장을 다그치자 돌아온 답은 “현재 사업 중인 공정기기 부문의 전체적인 시장규모를 정확히 알 길이 없고, 인접한 사업 영역도 어떻게 구성되는지 파악하기 힘드니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를 내기가 어려운 건 당연하다”는 논리였다. 그나마 영업사원들이 대리점들로부터 들은 풍문들을 바탕으로 시장을 분석하고 사업 기획안을 구성한 뒤, 인터넷 검색으로 찾은 데이터로 채워 넣은 그 보고서가 최선이란 항변이었다. 당신이 전 상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전히 많은 기업에서는 현재 사업을 벌이고 있는 시장의 규모와 동향을 파악하거나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를 찾으려는 노력을 마케팅이나 기획 부서의 담당자 개인에게 돌리고 있다. 또는 기획, 마케팅, 영업부서들이 마치 ‘폭탄돌리기’를 하듯 서로 떠넘기기 급급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상황이 이러니 관리자들은 ‘마른 수건 쥐어짜기’를 그나마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실적이 부진할 때 영업사원을 몰아치면 지역 내의 모든 고객사를 다 방문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매출을 일으켜 온다거나, 무조건 담당자를 닦달하기만 하면 시장에 대한 분석자료를 바탕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나 기획 자료를 뚝딱 만들어 올 것으로 생각하는 식이다.


하지만 이는 원양어선을 타고 망망대해로 나선 어부에게 갓 수확한 햅쌀을 가져오라고 재촉하는 꼴과 다를 게 없다. 사업에 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고 부진한 영업 실적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만으로는 안된다. 시장에 관한 ‘사실’이 반드시 근거가 돼야 하는데, 이에 대한 자료나 지원 체계가 전혀 없으니 제대로 된 방안을 만들 도리가 없는 것이다.


화장품, 생활용품 같은 소비재나 반도체 같은 주요 산업의 경우 증권 분석가와 조사기관들이 시장에 관한 조사를 하고 발표를 한다. 또 수많은 언론 매체에서 이를 다루면서 관련 정보가 활발하게 재생산된다. 이렇듯 B2C(기업 대 소비자) 영역이나 일부 주요 B2B(기업 대 기업) 영역에 대해서는 비교적 시장 정보를 얻기 쉽다. 하지만 일반 소비자들에게 큰 주목을 받지 못하는 상품서비스의 경우나 대다수의 B2B 분야에서는 시장이나 고객에 대한 분석이 결코 쉽지 않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마켓 인텔리전스(market intelligence)’다. 마켓 인텔리전스를 구성하는 개념 중 고객만족도 조사, 광고효과 조사, 브랜드 인지도 및 선호도 조사 등 B2C 중심의 개념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보다 전문적인 산업분야나 B2B 성격이 강한 영역에서 활용되는 시장 세분화, 고객회사 분석, 신규 사업 발굴, 해외진출 타당성 평가, 잠재 고객기반 조사 등의 핵심 개념들은 아직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B2B 영역에서는 시장 관련 조사와 사실 분석을 기반으로 한 의사결정이 애초에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나타내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과거 모범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제너럴일렉트릭(GE)의 경우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전문 마케팅 조직을 두지 않았다. 일례로 항공기 엔진을 제조하는 GE에이비에이션의 경우 주요 경쟁사가 롤스로이스와 프랫앤드휘트니뿐이었던 터라 시장조사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장이 점차 성숙화하면서 GE 경영진은 급격한 유가 변동, 항공 수요 감소, 규제 강화 등 산업환경 변화에 대해 경영진 수준에서 명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이후 GE에서는 2008~2009년 사이 마케팅 담당자들이 모여 그룹 마케팅 기능을 표준화하는 등 전반적인 마케팅 기능 강화를 위해 힘썼다. 이 과정에서 GE는 우선 마케팅의 주요 기능을 GTM(go-to-market)과 CE(commercial essential) 2개 영역으로 그룹화하고 GTM에 시장 관련 지식(market knowledge)을 담당하는 기능을 뒀다. 여기에 외부 트렌드와 영향요소 식별, 지식 및 데이터의 수집 관리, 시장 경쟁사 고객 분석, 전략 방향 제언과 같은 기능들을 추가했다. GE는 이런 투자와 노력을 통해 강력한 마케팅 조직을 가진 대표적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바꿔 말하면 B2B 영역에서도 급변하는 비즈니스 환경에 대응해 지속적으로 성장해 나가기 위해서는 마켓 인텔리전스 도입을 통해 시장과 고객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경쟁력 강화 및 유지의 발판으로 마켓 인텔리전스를 채택한 다른 성공 사례로는 글로벌 B2B 제조업계에서 또 하나의 거인으로 꼽히는 지멘스(Siemens)를 들 수 있다. 지멘스는 ‘현재 우리가 보유한 기술로 뭘 만들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그치지 않고, ‘이 세상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그 답을 찾아내기 위해 움직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미래 사회에 관한 여러 아이디어를 모아 미래 시나리오를 구성하고, 자사의 사업 포트폴리오 구조에 입각해 이를 현실화하기 위한 기술 연구와 제품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이다.


주목할 점은 이 과정에서 체계적이고 정확한 시장 조사 및 분석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디어를 현실화하기 위해 고객에 대한 분석도 매우 철저하게 한다. 지멘스가 미래의 선도적인 기술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이런 마켓 인텔리전스에 있다.


이 밖에도 많은 글로벌 선도기업이 마켓 인텔리전스 체계를 운영하고 있다. 대부분 각 법인 및 영업 담당자가 현재 시장 규모를 비롯해 앞으로의 시장 확장 가능성, 고객사 현황, 경쟁사 동향 등을 취합해 본사의 마켓 인텔리전스 담당자에게 보내면 외부 전문기관 자료와 대조·보완해 각 기업 관점의 세분시장별 규모를 산출하고 종합적 동향에 대해 분석해 공유하는 방식이다.


이들 기업은 이 같은 조사·분석 활동을 몇 년에 한 번씩 간헐적으로 수행하는 특별 업무로서가 아니라 전문적이면서도 상시적인 업무로 편성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시장의 변화 속도와 불확실성이 증가함에 따라 ‘언제, 어디서, 어떻게 경쟁할지’ 의사결정이 수시로 필요하게 됐다. 이를테면 하나의 제품을 출시하거나 단종할 때도, 새로운 지역에서 영업을 개시할 때도, 이미 사업을 왕성하게 영위 중인 과정에서도 이런 의사결정이 수시로 필요하게 된 것이다.


B2B 업계에서는 고객사가 확정한 물량의 변경은 물론 제품 자체의 설계를 바꿔야 하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또 대형 영업 기회가 있었는데도 경쟁업체에서 계약을 할 때까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지나치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이는 모두 시장에 대한 ‘가시성(visibility)’이 떨어지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인데,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략적인 마켓 인텔리전스가 필요하다. 시장에 대한 가시성 확보를 위해서는 단순히 자사와 납품관계에 있는 업체를 아는 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시장은 상·하·좌·우로 여러 단계에 걸쳐 이뤄져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시장을 새로운 개념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가령 플랜트에 설치되는 공정 장비나 주변 장비의 경우 최종 고객사가 아닌 설계·구매·시공(EPC) 업체나 전문설계(FEED) 업체가 결정권을 갖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이들을 공략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때도 있다. 이처럼 시장마다 구조와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영업의 목표와 대상을 결정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마켓 인텔리전스다.


생각을 조금 더 확장해보면 자사의 제품과 서비스가 흘러가는 경로와 흐름에 따라 ‘고객의 고객’, 그리고 ‘최종 고객’을 이해하고 응대해야 한다. 여기서 수직시장(vertical market)에 대한 이해 필요성이 대두된다. 내 고객이 소속해 있는 산업과 시장의 동향은 어떤지, 내 고객의 고객은 누구인지, 시장의 상황으로 인해 어떤 의사결정을 할 것으로 추정되며, 그 결정이 거래선을 타고 어떻게 파급돼 올지에 대한 분석과 예측, 대응방안의 수립이 필요하다.


제대로 된 시장 조사와 분석을 위해서는 시장에 대한 관점과 프레임워크가 있어야 한다. B2B 영역에서는 최우선적으로 지역과 수직시장 단위의 접근을 추천한다. 예를 들어 여러 용도로 활용되는 금형을 제조하는 기업이라면 전자제조·자동차부품·생활용품·공정장비·기타산업과 같은 형태로 시장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구체적인 제품의 매출 비중이나 각 세분시장의 현재 규모, 잠재 규모 등을 모두 고려한 분석을 반복적으로 실시해 세분시장을 확정해야 한다.


또 시장규모나 변동추이, 정성적 동향, 산업별 고객사 및 잠재 고객사들의 움직임 등을 추적·관리해야 한다. 각 상위 및 세부 산업별, 지역별로 시장에 관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원천을 식별하고 확보해야 한다. 각 산업 협회 등 특화 정보 원천도 존재하지만, 전체적인 산업을 볼 수 있는 전문 정보 원천도 함께 검토해야 한다.


이와 같이 효과적인 마켓 인텔리전스에는 수직시장 단위로 계량적·비계량적 정보들을 통합적으로 수집, 분석해 자사에 유의미한 전략적 시사점을 도출하고 영업기회를 창출하는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포함된다. 시장 세분화, 데이터 모델에 기반한 계량정보 체계화 등 기업의 마켓 인텔리전스 체계 구축에 있어 필요한 주요 활동과 고려 사항에 대해서는 다음 회차에 알아보도록 하겠다.


오용석


언스트앤영 한영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