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얘기가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축구, 그리고 다른 하나는 군대라고 한다. 그런데 내가 군대 얘기를 하게 되었다. 군에서 죽을 뻔 안한 ‘놈’ 없고, 고참병이나 조교 좋게 얘기한 ‘놈’ 드물다. 모두가 본인의 군생활이 병영생활의 표본인 양 말한다. 좋게 보면 호연지기요, 심하게 말하면 ‘뻥튀기’다. 그것은 가장 감수성이 예민할 때 전국에서 모여든 청년들과 갖는 첫 공동생활 경험이기 때문이리라.

고이 기른 머리가 잘려 나갈 때 지성이나 야망, 꿈이 다 잘려 나가는 듯한 아픔을 삭이며 이발병의 머리 자르는 소리 뒤로 들려오는 정훈희의 ‘안개’라는 노래는 왜 그리 서러웠던가. 6주 훈련기간 동안 발이 안 보이게, 눈썹이 휘날리게 뛰며 내 인생에서 가장 짧은 목욕, 2~3분이면 먹어 치우는 짬밥이 왜 그리 동료의 짬밥과 비교가 되어 내 것이 적어 보이던지….

앉은 번호와 원위치, 선착순으로 단련된 6주가 금방 지나가고, 훈련이 끝나는 날 가족들이 들고 온 사제밥을 너무 많이 먹어 며칠간 배탈이 났던 기억. 통신학교로 전보돼 받은 첫 1박2일의 외박. 비 내리는 호남선 완행열차를 타고 한 걸음에 다다른 집에서 버선 발로 뛰어나온 어머님과의 포옹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1968년 1월21일 첫 외박 후 아쉬움을 뒤로하고 귀대하는 꼴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꼴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동기생 한 명의 미귀로 그날 밤 팬티바람에 집합을 해야 했다. 너무 추워 모두가 그저 “어어어~” 하며 부르르 떨었다. 그날이 바로 북한 김신조 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하던 날이었다. 전군에 비상이 걸리고 그때부터 우리 군은 ‘혁명적인 개혁’의 첫발을 내디뎠다.

당장 복무기간이 30개월에서 36개월로 연장되고, 사격훈련과 모래주머니 차고 달리기가 의무화됐다. 페치카 당번병과 화악산 정상 무선중계소의 파견병 생활을 하던 나는 베트남전에 자원했다. 부산에서 베트남 퀴논까지의 항해는 고통이었다. 항해 1주일간 이어진 멀미, 갑판에 누워 물만 마셨다.

별을 보며 겨우겨우 퀴논에 도착했을 때의 후련함이란. 타는 목마름으로 물을 목젖까지 먹고 물이 출렁거리는 느낌으로 걸으며 맹호부대에 도착했을 때 “장교 일어서, 사병 앉아” 하던 지휘관의 명령이 얼마나 신선했던가. 그러나 나의 월남파병생활은 5개월 만에 끝났다.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을 한다고 온 국가가 들썩일 때 군에서도 정훈교육을 통해 그 당위성을 강요받고 있었다. 자유민주주의를 교과서로만 배운 법학도로서 3선 개헌을 비판하는 글을 친구에게 보낸 것이 적발돼 조기 귀국의 불명예에다 제대 후에도 정보기관의 감시하에 살았다. 다행스럽게 그것이 행정고시 면접에서 문제되지 않았지만 가슴을 쓸어내린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후 고위공직자로서 20여년, 기업에서 12년을 살면서 과거 내가 박정희 시대를 교과서적으로만 비판하고 산업발전의 토대를 일군 긍정적 측면도 함께 고려하지 못했던 순진했던 시절이 한편으론 부끄럽다는 생각도 든다.

한국에서 군생활은 남성들에게 있어 사회화의 중요한 한 과정이다. 신성한 국방의무를 모두가 수행해야 한다면 그냥 시간을 때우는 식이 아니라 기회비용적 관점에서 좀 더 생산적으로 활용하면 어떨까. 군생활은 좋게 보면 인내심을 키우고 도전정신을 배우는 청년기의 좋은 경험이다.올림픽메달리스트에게 군 면제를 해주는 것이 특혜가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로 군 복무기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