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 매니지먼트] 김경진 한국EMC 사장, 한국 IT업계 산 증인…글로벌 직관 갖춘 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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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
80년대 PC개발·수출 진두지휘
美본사도 놀란 시장점유율 1위
집념의 'IT 가이'
美 수출할 현대 PC 25만대, 운영체제 하부라인 모두 짜…현지 AS도 직접가서 '해결'
변화, 두렵지 않다
천막서 보낸 어린시절 딛고 亞 최초 EMC 수석 부사장에…핵심 중시하는 '성과 경영'
80년대 PC개발·수출 진두지휘
美본사도 놀란 시장점유율 1위
집념의 'IT 가이'
美 수출할 현대 PC 25만대, 운영체제 하부라인 모두 짜…현지 AS도 직접가서 '해결'
변화, 두렵지 않다
천막서 보낸 어린시절 딛고 亞 최초 EMC 수석 부사장에…핵심 중시하는 '성과 경영'
“면접 결과를 지금 알려주십시오. 합격인지 아닌지.”
1984년 가을 경기도 이천 현대전자 본사. 면접을 막 끝낸 27세 청년은 문으로 걸어나가다 말고 우뚝 멈춰서서 ‘당돌한’ 요구를 했다. 면접관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시험을 ‘오늘’ 봤잖습니까. 2주만 기다리면 결과가 나옵니다.” “안 됩니다. 지금 알아야겠습니다.”
삼성전자와 현대전자 두 곳에 원서를 낸 청년은 이미 삼성전자에 합격해 이튿날 입사를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현대전자에 합격한다면 꼭 이곳으로 가고 싶었다. 컴퓨터 시스템을 동작시키는 ‘시스템 프로그래밍’ 부서는 당시 이 회사에만 있었다. 컴퓨터 구조 전반에 관심이 깊었던 청년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두루 다루는 시스템 프로그래머가 꿈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면접관들은 일단 그를 기다리게 한 뒤 다른 면접을 진행했다. 모든 면접자들이 돌아가고 난 뒤,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집념의 청년’에게 합격 소식이 들려왔다.
스토리지 전문업체인 한국EMC 김경진 사장(55)의 얘기다. 남다른 사연으로 정보기술(IT) 업계에 첫발을 내디딘 그는 이후 30년 가까이 이 분야에 몸담으며 ‘한국 IT업계 산 증 인’의 한 사람으로 불리게 된다.
◆다리 밑에서 산 어린시절
김 사장은 1957년 서울 한강로에서 4남1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제시대에 조그마한 어선을 빌려주는 사업을 하던 아버지는 6·25 전쟁 통에 전 재산을 잃고 재기의 몸부림을 치고 있던 때였다. 부모님은 아이들에게 “학교에 가서 많이 배우라”고 하면서도, 육성회비도 못 줄 형편이었다. 김 사장은 초등학교 시절 육성회비를 못 내 몇 번이나 학교에서 쫓겨나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 겨울,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홀로 남겨진 어머니는 가정부도 하고, 고물도 내다 팔면서 안간힘을 썼지만 단칸 셋방의 월세 ‘2000원’을 내기도 벅찼다. 월세를 거른 지 1년, 김 사장 가족은 방배동 서문여고 앞 다리 밑에서 천막을 치고 사는 신세가 됐다. 김 사장은 명문 서울고에 합격했지만, 눈물을 머금고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용산공고에 들어갔다.
어릴 때부터 그림도 잘 그리고, 손재주가 좋았던 그는 공고에서도 잘 적응했다. 회로 기판 만지는 데 재미를 붙이면서 국제기능올림픽 출전을 꿈꾸고 있었다. 그때 생각하지도 않던 대학 진학의 기회가 왔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군에서 제대한 큰형이 인쇄소에서 돈을 벌게 되면서 빠듯한 살림에 조금이나마 여유가 생겼다. 김 사장은 독학으로 입시 준비를 해 항공대 전자과에 합격했다. 물론 그 당시 학비가 가장 싼 대학이 항공대였다.
“꿈을 이루기 위해 한곳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건 아닙니다. 형편이 닿는 한도 내에서 꿈을 꾸고, 기회가 오면 전심전력으로 그 동아줄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매 순간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생각하다 보니 실용적이고 도전적인 성격이 몸에 익은 것 같아요.”
◆PC와의 인연
시스템 프로그래머로 성장할 기회도 그렇게 악착같이 잡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학사장교 1기’로 군복무를 마칠 무렵 대학 동기가 “개인용컴퓨터(PC) 산업이 앞으로 뜰 것”이라고 귀띔했다. 1980년대 초였다. 대형 컴퓨터인 메인프레임은 이미 나와 있었지만, PC는 IT의 본고장인 미국에서조차 새로운 기기였다.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이 만든 ‘애플Ⅱ’가 막 미국 시장에서 팔리기 시작할 때였다. 친구는 “기계를 직접 제어하는 언어를 배워 시스템 프로그래머가 되면 PC에 대해 훤해질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거다 싶었다. 면접 당일 ‘합격 여부를 바로 알려달라’는 억지를 부려가며 시스템 프로그래머로 현대전자에 입사한 그는 이천 연구소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하루종일 코딩을 하고, 외국 프로그래머들이 짜 놓은 프로그램을 해체해 이해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입사 2년이 지난 1986년, 회사는 PC의 미국 수출에 나섰다. 미국 블루칩사와 첫 계약한 수량이 25만대나 됐다. 당시 운영체제(OS)는 PC 제조사에서 직접 만들었다. PC의 운영체제 하부에 들어가는 디바이스 드라이버·명령 라인 인터페이스·바이오스 인터페이스 등을 모두 김 사장이 짰다.
수출 물량이 많아지면서 미국 현지에서 애프터서비스 문제가 생겼다. 본사에서 파견보낸 사람은 당연히 ‘PC통’인 김 사장이었다. 1987년 애리조나 피닉스에 있는 블루칩 본사의 콜센터에 배치된 그는 알래스카부터 플로리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투리로 걸려 오는 전화를 응대하며 ‘PC 닥터’역할을 맡았다. 하루 수백 통씩 걸려 오는 전화를 응대하다 보니 어느덧 영어 실력이 급격히 향상됐다. 능력 있는 엔지니어에다 말까지 되다 보니 러브콜이 잇따랐다.
◆이어지는 기회
가장 먼저 그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한 곳은 현대전자 미국법인이었다. 정몽헌 당시 현대전자 사장에게 승인을 받아 스카우트 작업을 진행하자, 이천 연구소 상사였던 이영희 전 현대정보기술 대표가 미국으로 직접 날아와 붙잡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미 ‘대처’에 눈을 뜬 ‘김 대리’는 결국 1988년 회사를 떠났다. LG그룹 일가인 구지회 사장이 세운 가인시스템, 인성정보와 같은 벤처 기업을 거쳐 다양한 분야의 프로그래밍 경험을 쌓으며 엔지니어로 실력을 쌓아갔다. 글로벌 그래픽 소프트웨어 전문기업인 실리콘그래픽스의 아태지역 비즈니스 매니저를 거쳐 1999년 스토리지 전문기업인 EMC 한국법인에 스카우트됐다.
어린시절부터 극도의 가난을 겪은 그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어렸을 때 집에 쌀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주린 시절을 겪다 보니 ‘변화’는 내가 늘 기꺼이 맞아 들여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습니다.”
◆글로벌 기업의 리더
2003년 한국EMC 사장이 된 그는 몇 가지 기록을 세웠다. 하나는 2008년 아태지역 임원 최초로 본사 부사장으로 승진한 것이다. 2010년에는 또다시 ‘아시아 최초’ 타이틀을 달고 본사 수석 부사장에 올랐다. 시장 기록도 갈아치웠다. 한국은 EMC가 진출한 세계 80여개 나라 가운데 미국 이외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한 최초의 시장이다. 올 1분기 기준 국내 외장형 디스크 스토리지 시장에서 EMC의 글로벌 점유율은 30.2%이지만, 한국 내에서는 이를 훨씬 웃도는 45.4%를 기록하고 있다.
“늘 곤란한 상황에서 최선을 찾다 보니 자연스레 ‘핵심’을 보는 법을 배우게 됐습니다. 중요하지 않은 것을 ‘가지치기’하다 보니 직선으로 난 길이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그의 이 같은 경영철학은 ‘성과주의’로 이어졌다. 그는 직원들에게 사람을 판단할 때 개인적인 부분과 객관적 능력을 분리해서 평가할 것을 강조한다. 한 임원을 질책했더니 “사장님, 저를 싫어하십니까”라고 반문했다는 일화를 예로 들며 한국적인 ‘정’의 문화를 넘어 글로벌 비즈니스 업계에 맞는 상식을 구축해야 비로소 세계화가 된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김 사장은 은퇴하면 그림을 그릴 계획이란다. 어린 시절부터 좋아하던 취미다. 대학원에 진학해 가정 형편 때문에 접었던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만학도의 꿈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는 대학시절 책장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전공 원서를 읽으며 ‘왜 이런 공식이 만들어졌을까’를 고민했던 때의 모습을 자주 떠올린다고 한다. 자신을 둘러싼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늘 최선의 가능성을 모색하며 운명을 개척해 온 그가 젊은이들에게 들려주는 멘토의 한마디. “남이 만든 가치나 권위에 속지 마세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삼아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이 가장 핵심에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김보영 기자 wing@hankyung.com
1984년 가을 경기도 이천 현대전자 본사. 면접을 막 끝낸 27세 청년은 문으로 걸어나가다 말고 우뚝 멈춰서서 ‘당돌한’ 요구를 했다. 면접관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시험을 ‘오늘’ 봤잖습니까. 2주만 기다리면 결과가 나옵니다.” “안 됩니다. 지금 알아야겠습니다.”
삼성전자와 현대전자 두 곳에 원서를 낸 청년은 이미 삼성전자에 합격해 이튿날 입사를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현대전자에 합격한다면 꼭 이곳으로 가고 싶었다. 컴퓨터 시스템을 동작시키는 ‘시스템 프로그래밍’ 부서는 당시 이 회사에만 있었다. 컴퓨터 구조 전반에 관심이 깊었던 청년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두루 다루는 시스템 프로그래머가 꿈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면접관들은 일단 그를 기다리게 한 뒤 다른 면접을 진행했다. 모든 면접자들이 돌아가고 난 뒤,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집념의 청년’에게 합격 소식이 들려왔다.
스토리지 전문업체인 한국EMC 김경진 사장(55)의 얘기다. 남다른 사연으로 정보기술(IT) 업계에 첫발을 내디딘 그는 이후 30년 가까이 이 분야에 몸담으며 ‘한국 IT업계 산 증 인’의 한 사람으로 불리게 된다.
◆다리 밑에서 산 어린시절
김 사장은 1957년 서울 한강로에서 4남1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제시대에 조그마한 어선을 빌려주는 사업을 하던 아버지는 6·25 전쟁 통에 전 재산을 잃고 재기의 몸부림을 치고 있던 때였다. 부모님은 아이들에게 “학교에 가서 많이 배우라”고 하면서도, 육성회비도 못 줄 형편이었다. 김 사장은 초등학교 시절 육성회비를 못 내 몇 번이나 학교에서 쫓겨나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 겨울,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홀로 남겨진 어머니는 가정부도 하고, 고물도 내다 팔면서 안간힘을 썼지만 단칸 셋방의 월세 ‘2000원’을 내기도 벅찼다. 월세를 거른 지 1년, 김 사장 가족은 방배동 서문여고 앞 다리 밑에서 천막을 치고 사는 신세가 됐다. 김 사장은 명문 서울고에 합격했지만, 눈물을 머금고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용산공고에 들어갔다.
어릴 때부터 그림도 잘 그리고, 손재주가 좋았던 그는 공고에서도 잘 적응했다. 회로 기판 만지는 데 재미를 붙이면서 국제기능올림픽 출전을 꿈꾸고 있었다. 그때 생각하지도 않던 대학 진학의 기회가 왔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군에서 제대한 큰형이 인쇄소에서 돈을 벌게 되면서 빠듯한 살림에 조금이나마 여유가 생겼다. 김 사장은 독학으로 입시 준비를 해 항공대 전자과에 합격했다. 물론 그 당시 학비가 가장 싼 대학이 항공대였다.
“꿈을 이루기 위해 한곳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건 아닙니다. 형편이 닿는 한도 내에서 꿈을 꾸고, 기회가 오면 전심전력으로 그 동아줄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매 순간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생각하다 보니 실용적이고 도전적인 성격이 몸에 익은 것 같아요.”
◆PC와의 인연
시스템 프로그래머로 성장할 기회도 그렇게 악착같이 잡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학사장교 1기’로 군복무를 마칠 무렵 대학 동기가 “개인용컴퓨터(PC) 산업이 앞으로 뜰 것”이라고 귀띔했다. 1980년대 초였다. 대형 컴퓨터인 메인프레임은 이미 나와 있었지만, PC는 IT의 본고장인 미국에서조차 새로운 기기였다.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이 만든 ‘애플Ⅱ’가 막 미국 시장에서 팔리기 시작할 때였다. 친구는 “기계를 직접 제어하는 언어를 배워 시스템 프로그래머가 되면 PC에 대해 훤해질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거다 싶었다. 면접 당일 ‘합격 여부를 바로 알려달라’는 억지를 부려가며 시스템 프로그래머로 현대전자에 입사한 그는 이천 연구소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하루종일 코딩을 하고, 외국 프로그래머들이 짜 놓은 프로그램을 해체해 이해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입사 2년이 지난 1986년, 회사는 PC의 미국 수출에 나섰다. 미국 블루칩사와 첫 계약한 수량이 25만대나 됐다. 당시 운영체제(OS)는 PC 제조사에서 직접 만들었다. PC의 운영체제 하부에 들어가는 디바이스 드라이버·명령 라인 인터페이스·바이오스 인터페이스 등을 모두 김 사장이 짰다.
수출 물량이 많아지면서 미국 현지에서 애프터서비스 문제가 생겼다. 본사에서 파견보낸 사람은 당연히 ‘PC통’인 김 사장이었다. 1987년 애리조나 피닉스에 있는 블루칩 본사의 콜센터에 배치된 그는 알래스카부터 플로리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투리로 걸려 오는 전화를 응대하며 ‘PC 닥터’역할을 맡았다. 하루 수백 통씩 걸려 오는 전화를 응대하다 보니 어느덧 영어 실력이 급격히 향상됐다. 능력 있는 엔지니어에다 말까지 되다 보니 러브콜이 잇따랐다.
◆이어지는 기회
가장 먼저 그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한 곳은 현대전자 미국법인이었다. 정몽헌 당시 현대전자 사장에게 승인을 받아 스카우트 작업을 진행하자, 이천 연구소 상사였던 이영희 전 현대정보기술 대표가 미국으로 직접 날아와 붙잡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미 ‘대처’에 눈을 뜬 ‘김 대리’는 결국 1988년 회사를 떠났다. LG그룹 일가인 구지회 사장이 세운 가인시스템, 인성정보와 같은 벤처 기업을 거쳐 다양한 분야의 프로그래밍 경험을 쌓으며 엔지니어로 실력을 쌓아갔다. 글로벌 그래픽 소프트웨어 전문기업인 실리콘그래픽스의 아태지역 비즈니스 매니저를 거쳐 1999년 스토리지 전문기업인 EMC 한국법인에 스카우트됐다.
어린시절부터 극도의 가난을 겪은 그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어렸을 때 집에 쌀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주린 시절을 겪다 보니 ‘변화’는 내가 늘 기꺼이 맞아 들여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습니다.”
◆글로벌 기업의 리더
2003년 한국EMC 사장이 된 그는 몇 가지 기록을 세웠다. 하나는 2008년 아태지역 임원 최초로 본사 부사장으로 승진한 것이다. 2010년에는 또다시 ‘아시아 최초’ 타이틀을 달고 본사 수석 부사장에 올랐다. 시장 기록도 갈아치웠다. 한국은 EMC가 진출한 세계 80여개 나라 가운데 미국 이외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한 최초의 시장이다. 올 1분기 기준 국내 외장형 디스크 스토리지 시장에서 EMC의 글로벌 점유율은 30.2%이지만, 한국 내에서는 이를 훨씬 웃도는 45.4%를 기록하고 있다.
“늘 곤란한 상황에서 최선을 찾다 보니 자연스레 ‘핵심’을 보는 법을 배우게 됐습니다. 중요하지 않은 것을 ‘가지치기’하다 보니 직선으로 난 길이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그의 이 같은 경영철학은 ‘성과주의’로 이어졌다. 그는 직원들에게 사람을 판단할 때 개인적인 부분과 객관적 능력을 분리해서 평가할 것을 강조한다. 한 임원을 질책했더니 “사장님, 저를 싫어하십니까”라고 반문했다는 일화를 예로 들며 한국적인 ‘정’의 문화를 넘어 글로벌 비즈니스 업계에 맞는 상식을 구축해야 비로소 세계화가 된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김 사장은 은퇴하면 그림을 그릴 계획이란다. 어린 시절부터 좋아하던 취미다. 대학원에 진학해 가정 형편 때문에 접었던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만학도의 꿈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는 대학시절 책장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전공 원서를 읽으며 ‘왜 이런 공식이 만들어졌을까’를 고민했던 때의 모습을 자주 떠올린다고 한다. 자신을 둘러싼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늘 최선의 가능성을 모색하며 운명을 개척해 온 그가 젊은이들에게 들려주는 멘토의 한마디. “남이 만든 가치나 권위에 속지 마세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삼아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이 가장 핵심에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김보영 기자 w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