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닛산자동차가 내년 중 미국에서 판매할 예정인 친환경차에 히타치제작소의 리튬이온전지를 장착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닛산이 친환경차의 핵심 부품인 리튬이온전지를 계열사가 아닌 다른 회사에서 구입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계열사 위주의 경직된 부품 공급 체계로는 수출 경쟁력을 갖추기 힘들다는 판단에서다. 그동안 닛산자동차는 일본 전자업체 NEC와의 합병회사 오토모티브에너지를 통해서만 리튬이온전지를 공급받아왔다.

○품질 좋고 값싼 곳에 주문 몰아줘

카를로스 곤 닛산 사장(사진)은 2000년 취임하자마자 철강제품 구입체계부터 뜯어고쳤다. 당시 일본 내 5개 철강사에 일정 비율씩 골고루 부여했던 구매비율을 깨고 경쟁입찰제도를 도입했다. 입찰에서 가장 싼 가격을 부른 신일본제철에만 발주물량을 몰아줬다. 도요타 등 경쟁 자동차회사들도 잇따라 닛산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철강업계엔 비상이 걸렸다.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는 철강사는 점점 더 설 땅이 좁아졌다. 결국 가와사키제철과 NKK 등 중소 제철소들은 합병을 통해 덩치 키우기에 나섰다. 자연스레 일본 전체 철강업계의 구조조정으로 이어졌다. 언론에서는 이를 ‘곤 쇼크’라고 불렀다.

리튬이온전지업계는 닛산의 이번 리튬이온전지 구입선 변경 결정을 ‘제2의 곤 쇼크’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한국 등 외국 경쟁 업체들의 급성장으로 가뜩이나 시장점유율이 떨어지고 있는 판에 닛산까지 나서서 ‘가격 하락’을 부채질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 말 기준 리튬이온전지 세계 시장점유율은 한국이 39%로 일본(35%)보다 앞서 있다. 닛산은 내년부터 미국 시장 주력 브랜드인 알티마와 패스파인더 등 두 종류의 친환경 차량에 히타치의 리튬이온전지를 사용할 계획이다.

○리튬이온전지 가격 파괴 신호탄

그동안 일본 자동차메이커와 전자업체는 리튬이온전지 분야에서 공생관계를 유지해왔다. 합작회사 설립을 통해 독점적인 공급체계를 구축했다. 닛산자동차는 NEC와 51 대 49의 지분 비율로 오토모티브에너지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도요타는 파나소닉과 공동으로 리튬이온전지 생산회사를 만들었다. 혼다와 미쓰비시자동차는 GS유아사라는 배터리업체와 손을 잡았다. 자동차업체는 친환경차 핵심 기술 유출을 막을 수 있고, 전자업체는 안정적인 공급처를 확보하는 ‘윈윈 전략’이었다.

그러나 2008년 미국 금융위기가 발생한 이후 수출시장이 얼어붙으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가격이 좀 비싸더라도 계열사 제품을 사주던 관행으로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든 구조가 된 것이다. 리튬이온전지의 품질이 어느 곳이나 비슷해진 것도 계열사 중심의 독점 공급체계를 깨뜨린 요인이다. 미국 제너럴모터스(GM)와 독일 BMW 등은 한국 등으로 리튬이온전지 공급선을 다변화했다. 중국 인도 등 신흥국 시장에서 저가 친환경차 수요가 늘고 있는 것도 부품 구입 가격을 낮출 수밖에 없는 요인이다.

닛산의 이번 결정으로 리튬이온전지 시장의 가격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기대했던 것에 비해 친환경차 판매가 늘지 않고 있는 것도 가격 하락을 점치게 한다. 닛산의 전기자동차 브랜드인 리프의 작년 판매 대수는 2만여대로 당초 목표치인 5만대의 40%에 그쳤다.

요미우리신문은 “일본 리튬이온전지업계는 지금 공급과잉 상태”라며 “추가적인 가격 하락이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일본 정부는 지난달 발표한 일본재생전략에서 리튬이온전지의 세계 시장점유율을 50%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도쿄=안재석 특파원 yagoo@hankyung.com

● 곤 쇼크
Ghosn shock. 카를로스 곤 닛산 사장은 2000년 취임과 동시에 철강제품 구매 때 경쟁입찰제를 도입했다. 5개 철강사에 물량을 골고루 나눠주던 관행을 깨고 경쟁입찰을 전격 시행하면서 일본 철강업계가 큰 충격을 받아 ‘곤 쇼크’라는 신조어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