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계침구, 40년 침구 한우물…1000여 거래처 빼곡한 대학노트가 '보물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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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훈의 기업인 탐구 - 한능해 <상계침구 사장>
영업·생산 30년 발로 뛴 현장…침구의 모든 것 담긴 '내공 정수'
모친이 창업…아들이 代이어…Ivory마크 침구 인기 꾸준
한국적 문양의 손자수 제품…해외수출 적극 나설 계획
영업·생산 30년 발로 뛴 현장…침구의 모든 것 담긴 '내공 정수'
모친이 창업…아들이 代이어…Ivory마크 침구 인기 꾸준
한국적 문양의 손자수 제품…해외수출 적극 나설 계획
서울 동북쪽 수락산역 부근에 상계침구(사장 한능해·59)가 있다. 이불 요 베개 담요 등 침구류를 만드는 업체다. 1972년 문을 연 이 회사는 올해로 창업한 지 꼭 40년이 됐다. 원단을 짜고 날염 가공한 뒤 재단 봉제 자수를 거쳐야 하는 침구는 기능인력을 확보하기 어려워 생산공정을 이어가기가 쉽지 않은 분야다. 그런데도 이 회사가 이곳에서 대를 이어 경영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1990년대 초 서울 동대문시장. 자정 무렵이 되자 불야성을 이룬다. 전세버스를 타고 밤늦게 몰려든 지방 상인들은 밤샘 쇼핑을 통해 원하는 제품을 몇 보따리씩 사들였다. 이곳에 키가 작고 다부진 몸매의 한 중소기업인이 나타났다. 그러자 이곳저곳에서 그를 불러세웠다. “한 사장님~ 저희 집에 물건을 먼저 좀 보내주세요. 지방에서 온 손님들이 제품을 빨리 달라고 난리예요.”
당시 동대문시장은 침구 유통의 메카였다. 이곳에서 상계침구는 제법 대접받는 브랜드였다. 키 작은 중소기업인은 바로 상계침구의 한능해 사장이었다. 당시 이 회사의 거래처는 400여곳이 넘었다. 주로 동대문과 남대문시장의 도매상들이었다. 이불 요 침대커버 베개 등을 만드는 상계침구는 다양한 디자인과 질 좋은 소재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다보니 물건을 파는 입장이었지만 ‘을’보다는 ‘갑’으로 행세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는 이때 사업을 축소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뭔가 조짐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봉제산업은 이미 중국으로 이전하기 시작했고 여기저기서 어음부도 사건이 터져나왔다. 부도어음의 파고가 상계침구에도 밀려오기 시작했다. 단순히 매출 신장세로만 보면 사업을 확장해야 했지만 그는 ‘큰 덩치로는 앞으로 닥쳐올 거대한 파도를 넘을 수 없다’며 선제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모든 것을 직접 생산하던 방식에서 협력업체 체제로 전환했다. 이 과정에서 200여명에 이르던 직원을 10명 이내로 줄였다. 살을 도려내는 아픔이었다. 대신 수십개의 협력업체(현재 16개, 종업원 80여명)와 제휴를 맺었다. 제품 기획과 고부가가치 제품은 본사에서 생산하고, 나머지는 협력업체에 맡겼다. 거래처도 우량업체 중심으로 재편했다. 이 과정에서 거래처는 400여개에서 100여개로 줄였다.
한 사장은 “아마 이때 구조조정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지금 상계침구는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회고했다. 이 회사가 40년 동안 유지해온 데는 발빠른 구조조정 외에 몇 가지 이유가 더 있다.
첫째, 전통미를 살린 제품이다. 이 회사에는 미국 캐나다 일본 호주 등지의 해외 동포들이 종종 찾아온다. 우리의 전통 문양 침구류를 수입해 가기 위해서다. 해외에서 생활하는 나이 든 동포 가운데 우리 침구를 깔고 덮어야 향수를 달랠 수 있다며 이를 찾는 경우가 있다. 상계침구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어 동포 사이에 제법 알려져 있다.
이 회사는 특히 손으로 직접 수를 놓는 손자수에 강하다. 이 분야 경력이 30년을 넘는 ‘손자수 장인’도 두고 있다. 그는 원단에 꽃무늬를 비롯해 각종 전통 무늬를 자유자재로 누빈다. 기계 자수와는 달리 손자수는 똑같은 무늬가 하나도 없다. 그때그때 손이 가는 대로 무늬를 놓기 때문이다. 기계 자수에 비해 세련된 맛은 덜할 수 있다. 하지만 손으로 놓은 것이어서 부드럽고 친근감이 느껴진다.
둘째, 숙련된 기능인력이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대부분 20~30년 경력자다. 한 사장 역시 1983년부터 경영에 참여해 30년 가까이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이 회사는 한 사장의 어머니인 이정순 씨(80)가 창업했다. 당시 사명은 상계누비였다. 이불 요 베개 등을 만들어 광장시장이나 동대문종합시장 등에 팔았다. 한 사장은 성균관대 화학공학과를 나와 ROTC 대위로 예편한 뒤 삼성그룹에 1년간 몸담았다가 가업을 이어받았다. 그 역시 손이 달릴 때는 생산에 직접 나설 정도로 현장 경험이 풍부하다.
셋째, 발로 뛰는 경영이다. 중소기업 사장이 대부분 그렇듯 한 사장 역시 1인 10역을 한다. 제품 개발에서 수주 거래처 및 협력업체 관리까지 모든 것을 관장한다. 그가 얼마나 열심히 뛰는지는 한 권의 대학노트가 보여준다. 원래 흰색이던 공책이 오랫동안 쓰다보니 누런색으로 바뀌었다. 이곳에는 1000여개 거래처의 전화번호가 빼곡히 적혀 있다. 100여곳의 원단업체, 30여곳의 원사업체 이름과 연락처가 기록돼 있다. ‘베개’라는 항목에는 방학동 도깨비시장의 미싱사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그는 “이 장부책이 바로 보물”이라며 껄껄 웃는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그 분야에서 누가 가장 뛰어난지를 기록해놓은 ‘노웨어(Know Where)’의 보고(寶庫)이기 때문이다. 수십년간 거래처를 발로 뛰며 얻은 것이다. 예컨대 물량이 많고 납기가 충분할 때는 어디에 맡기고 적은 물량을 밤을 새워 완성해야 한다면 어디에 의뢰해야 하는지를 담고 있다.
지금은 아들 한광영 부장(32)이 한 사장 밑에서 경영 수업을 받고 있다. 한 사장은 제품 개발부터 생산 영업 납품 수금에 이르는 전 과정을 하나씩 가르치고 있다. 그의 부인(노영희 씨)은 내수 영업을 담당한다. 가족이 함께 출근해 일한다.
이 회사 제품은 동대문시장이나 남대문시장에서도 꾸준히 팔려나간다. 호텔이나 콘도 펜션에서 덮은 이불에 ‘아이보리(Ivory)’ 마크가 찍혀 있다면 바로 상계침구에서 만든 제품이다. 이 회사의 상징이 바로 영문 아이보리기 때문이다. 그 아이보리 위에는 작은 돌고래가 날렵하게 헤엄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는 “시중 판매를 줄인 대신 나라장터에 응찰해 공공기관 물량을 수주해 적기에 좋은 품질의 제품을 납품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꿈은 두 가지다. 첫째는 작지만 강한 고품질 침구업체로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아들에게 협력업체의 품질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원사는 어디서 사면 좋고 염색은 어디가 잘하는지 등을 전해준다. 그는 “염색 특히 날염은 한국이 최고의 선진국”이라며 날염을 잘하는 업체의 리스트를 알려준다. 아울러 외상거래나 어음거래는 절대 못하도록 가르친다. 매출 신장보다는 내실을 다지는게 중요하다고 재삼 강조한다.
또 하나는 수출 확대다. 한 사장은 “인견이나 면 소재에 한국적 문양의 수를 놓은 이불은 외국에서 오랫동안 산 동포들이 아주 좋아하는 제품”이라며 “이런 제품으로 해외시장 개척을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갈 생각”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김낙훈 중기전문기자 nhk@hankyung.com
1990년대 초 서울 동대문시장. 자정 무렵이 되자 불야성을 이룬다. 전세버스를 타고 밤늦게 몰려든 지방 상인들은 밤샘 쇼핑을 통해 원하는 제품을 몇 보따리씩 사들였다. 이곳에 키가 작고 다부진 몸매의 한 중소기업인이 나타났다. 그러자 이곳저곳에서 그를 불러세웠다. “한 사장님~ 저희 집에 물건을 먼저 좀 보내주세요. 지방에서 온 손님들이 제품을 빨리 달라고 난리예요.”
당시 동대문시장은 침구 유통의 메카였다. 이곳에서 상계침구는 제법 대접받는 브랜드였다. 키 작은 중소기업인은 바로 상계침구의 한능해 사장이었다. 당시 이 회사의 거래처는 400여곳이 넘었다. 주로 동대문과 남대문시장의 도매상들이었다. 이불 요 침대커버 베개 등을 만드는 상계침구는 다양한 디자인과 질 좋은 소재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다보니 물건을 파는 입장이었지만 ‘을’보다는 ‘갑’으로 행세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는 이때 사업을 축소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뭔가 조짐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봉제산업은 이미 중국으로 이전하기 시작했고 여기저기서 어음부도 사건이 터져나왔다. 부도어음의 파고가 상계침구에도 밀려오기 시작했다. 단순히 매출 신장세로만 보면 사업을 확장해야 했지만 그는 ‘큰 덩치로는 앞으로 닥쳐올 거대한 파도를 넘을 수 없다’며 선제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모든 것을 직접 생산하던 방식에서 협력업체 체제로 전환했다. 이 과정에서 200여명에 이르던 직원을 10명 이내로 줄였다. 살을 도려내는 아픔이었다. 대신 수십개의 협력업체(현재 16개, 종업원 80여명)와 제휴를 맺었다. 제품 기획과 고부가가치 제품은 본사에서 생산하고, 나머지는 협력업체에 맡겼다. 거래처도 우량업체 중심으로 재편했다. 이 과정에서 거래처는 400여개에서 100여개로 줄였다.
한 사장은 “아마 이때 구조조정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지금 상계침구는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회고했다. 이 회사가 40년 동안 유지해온 데는 발빠른 구조조정 외에 몇 가지 이유가 더 있다.
첫째, 전통미를 살린 제품이다. 이 회사에는 미국 캐나다 일본 호주 등지의 해외 동포들이 종종 찾아온다. 우리의 전통 문양 침구류를 수입해 가기 위해서다. 해외에서 생활하는 나이 든 동포 가운데 우리 침구를 깔고 덮어야 향수를 달랠 수 있다며 이를 찾는 경우가 있다. 상계침구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어 동포 사이에 제법 알려져 있다.
이 회사는 특히 손으로 직접 수를 놓는 손자수에 강하다. 이 분야 경력이 30년을 넘는 ‘손자수 장인’도 두고 있다. 그는 원단에 꽃무늬를 비롯해 각종 전통 무늬를 자유자재로 누빈다. 기계 자수와는 달리 손자수는 똑같은 무늬가 하나도 없다. 그때그때 손이 가는 대로 무늬를 놓기 때문이다. 기계 자수에 비해 세련된 맛은 덜할 수 있다. 하지만 손으로 놓은 것이어서 부드럽고 친근감이 느껴진다.
둘째, 숙련된 기능인력이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대부분 20~30년 경력자다. 한 사장 역시 1983년부터 경영에 참여해 30년 가까이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이 회사는 한 사장의 어머니인 이정순 씨(80)가 창업했다. 당시 사명은 상계누비였다. 이불 요 베개 등을 만들어 광장시장이나 동대문종합시장 등에 팔았다. 한 사장은 성균관대 화학공학과를 나와 ROTC 대위로 예편한 뒤 삼성그룹에 1년간 몸담았다가 가업을 이어받았다. 그 역시 손이 달릴 때는 생산에 직접 나설 정도로 현장 경험이 풍부하다.
셋째, 발로 뛰는 경영이다. 중소기업 사장이 대부분 그렇듯 한 사장 역시 1인 10역을 한다. 제품 개발에서 수주 거래처 및 협력업체 관리까지 모든 것을 관장한다. 그가 얼마나 열심히 뛰는지는 한 권의 대학노트가 보여준다. 원래 흰색이던 공책이 오랫동안 쓰다보니 누런색으로 바뀌었다. 이곳에는 1000여개 거래처의 전화번호가 빼곡히 적혀 있다. 100여곳의 원단업체, 30여곳의 원사업체 이름과 연락처가 기록돼 있다. ‘베개’라는 항목에는 방학동 도깨비시장의 미싱사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그는 “이 장부책이 바로 보물”이라며 껄껄 웃는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그 분야에서 누가 가장 뛰어난지를 기록해놓은 ‘노웨어(Know Where)’의 보고(寶庫)이기 때문이다. 수십년간 거래처를 발로 뛰며 얻은 것이다. 예컨대 물량이 많고 납기가 충분할 때는 어디에 맡기고 적은 물량을 밤을 새워 완성해야 한다면 어디에 의뢰해야 하는지를 담고 있다.
지금은 아들 한광영 부장(32)이 한 사장 밑에서 경영 수업을 받고 있다. 한 사장은 제품 개발부터 생산 영업 납품 수금에 이르는 전 과정을 하나씩 가르치고 있다. 그의 부인(노영희 씨)은 내수 영업을 담당한다. 가족이 함께 출근해 일한다.
이 회사 제품은 동대문시장이나 남대문시장에서도 꾸준히 팔려나간다. 호텔이나 콘도 펜션에서 덮은 이불에 ‘아이보리(Ivory)’ 마크가 찍혀 있다면 바로 상계침구에서 만든 제품이다. 이 회사의 상징이 바로 영문 아이보리기 때문이다. 그 아이보리 위에는 작은 돌고래가 날렵하게 헤엄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는 “시중 판매를 줄인 대신 나라장터에 응찰해 공공기관 물량을 수주해 적기에 좋은 품질의 제품을 납품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꿈은 두 가지다. 첫째는 작지만 강한 고품질 침구업체로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아들에게 협력업체의 품질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원사는 어디서 사면 좋고 염색은 어디가 잘하는지 등을 전해준다. 그는 “염색 특히 날염은 한국이 최고의 선진국”이라며 날염을 잘하는 업체의 리스트를 알려준다. 아울러 외상거래나 어음거래는 절대 못하도록 가르친다. 매출 신장보다는 내실을 다지는게 중요하다고 재삼 강조한다.
또 하나는 수출 확대다. 한 사장은 “인견이나 면 소재에 한국적 문양의 수를 놓은 이불은 외국에서 오랫동안 산 동포들이 아주 좋아하는 제품”이라며 “이런 제품으로 해외시장 개척을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갈 생각”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김낙훈 중기전문기자 n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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