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뉴욕을 떠나 로스앤젤레스(LA)로 오고 싶어하시지 않는 것은 웨그먼스 때문입니다. LA에는 웨그먼스가 없죠.” 할리우드 유명 배우 알렉 볼드윈이 데이비드 레터맨쇼에서 한 말이다. “우리 동네에도 웨그먼스를 열어주세요.” 2010년 웨그먼스는 체인점이 없는 지역 주민들로부터 이런 편지를 줄줄이 받았다. 지점을 열어달라는 편지는 7000통이 넘었다.

웨그먼스는 과일과 야채, 생선, 고기 등을 파는 식료품 체인이다. 미국 동부지역에 자리잡은 웨그먼스의 지점은 고작 80여개. 27개국에서 1만185개의 지점을 운영하고 있는 월마트에 비하면 초라하다. 그러나 웨그먼스는 올해 미국 컨슈머리포트가 선정한 미국 대형 식료품 체인 평가에서 1위에 올랐다. 작지만 강하고 매력적인 식료품 체인이라는 평가다. 웨그먼스를 일군 주인공은 대니 웨그먼 웨그먼스 최고경영자(CEO·64)다.

◆‘공룡 월마트와 어떻게 맞설까’…전략의 탄생

1969년 5월. 하버드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던 웨그먼은 학사 학위 논문을 기분 좋게 마무리지었다. 타자기에서 조심스럽게 논문 마지막 페이지를 빼냈다. 완성된 원고를 봉투에 집어넣었다. 지도교수에게 논문을 보낼 준비를 끝냈다. 한숨을 한번 쉬고 난 그는 붉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넘기고 의자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멋진 분석이야. 이건 A+ 논문이야.”

그러나 좋은 기분도 잠시. 무거운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곧 진짜 시험이 시작되겠지. 대형 할인점이 소규모 식료품점들의 심장을 겨누면 대체 뭘해야 하는 걸까.”

그의 논문 주제는 대형 할인점의 사업적 특성이었다. 당시 할인판매는 새로운 트렌드였다.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산업이기도 했다. 월마트가 대표주자였다. 주식을 공개한 지 1년 남짓 된 월마트는 거대한 물류시스템, 막강한 가격경쟁력을 앞세워 소매시장을 빠르게 잠식해나가고 있었다. 30년간 지속될 고속성장이 시작되던 때였다.

젊은 웨그먼은 일찌감치 이런 변화를 감지했다. 월마트의 비약적인 성장으로 전통적인 소규모 소매상들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져갈 것이란 점을 정확히 파악했다. 그의 관심은 학술적이거나 이론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개인적인 이유였다. 그의 가족이 뉴욕주 북서부 로체스터에서 식료품점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소기업’ 웨그먼스의 사업 전략은 이렇게 탄생했다.

◆‘따분한 식료품점을 매력적인 놀이터로’

웨그먼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월마트와 싸워서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가 얻은 답은 “월마트가 할 수 없는 것을 해야 한다”였다. 월마트의 양적 팽창에 질 좋은 서비스로 대응한다는 전략이었다. 그는 졸업 후 아버지 회사에 입사했다. 월마트의 공격을 이겨낼 전략을 하나하나 실행에 옮겼다. 세계적인 경영컨설턴트 에이드리언 슬라이워츠키는 자신의 저서 ‘디맨드’에서 “대니 웨그먼의 뛰어난 전략 덕분에 웨그먼스가 월마트의 공격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매력적인 식료품점.’ 웨그먼의 전략이었다. 그는 매장을 통째로 바꿔갔다. 테마파크처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웨그먼스를 찾은 고객들은 쇼핑 리스트를 손에 쥐고 복도 사이를 뛰어다니지 않게 됐다. 예술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갤러리를 돌아보듯 천천히 갖가지 신기한 재료와 요리들을 음미한다. 따분한 식료품점을 매력적인 놀이터로 변신시킨 결과다. 한 고객은 “웨그먼스에 가는 이유는 흥분과 기대감 때문이죠. 모든 것들이 세심하게 마련돼 있어요”라고 말했다.

웨그먼은 제품 수도 늘렸다. 지금은 품목 수가 6만개에 달한다. 업계 평균(대형 체인점)에 비해 42% 많은 수준이다. 제품의 신선도도 남다르다. 납품업체들이 정해진 시간에 맞춰 제품을 공급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시간에 맞춰 납품하지 못한 업체들은 벌금을 물거나 계약을 취소당한다. ‘눈보라가 심해 제 시간에 제품을 공급하지 못했다’는 변명도 통하지 않을 정도다. 웨그먼스로부터 납품 계약을 취소당한 납품업체들을 대리해 소송을 진행하는 변호사조차 “웨그먼스가 가치 있는 상품을 공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고 말할 정도다.

웨그먼은 2008년 고객을 위한 또 하나의 결단을 했다. 경제위기가 닥치자 수백가지 제품의 가격을 인하했다. 돈에 쪼들리는 고객들의 식료품 쇼핑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웨그먼은 “어려운 시기에는 우리가 돈을 조금 덜 벌어도 괜찮다”고 말했다. 웨그먼이 가격 인하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불황으로 비용이 감소하리라는 것을 미리 예측했기 때문이다. 경기가 나빠지면 원자재와 연료 가격이 하락하게 마련이다. 비용 절감분을 미리 고객들에게 돌려준 셈이다.

제품과 서비스 수준을 높이는 데 힘쓰는 대신 매장은 공격적으로 늘리지 않았다. 웨그먼스는 매년 신규 매장을 두 곳 정도 연다. 질로 승부한 결과 웨그먼스의 영업이익은 할인점의 두 배에 달한다. 평방피트당 매출은 14달러로 업계 평균인 9.39달러보다 훨씬 많다.

◆‘새로운 수요를 만들어라’…교육의 힘

“고객들이 왜 생선을 안 사는지 아십니까. 생선을 어떻게 조리해서 먹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웨그먼 CEO의 말이다. 그는 고객들이 가정에서 음식을 쉽게 요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웨그먼스 매장 곳곳에서 직원들이 요리법을 알려준다. 이를 통해 식료품 수요를 창출할 수 있다고 봤다.

웨그먼은 때때로 세계 정상급 요리사들을 불러 요리 기법을 시연하도록 했다. 또 고객들에게 권장 식단과 조리법을 담은 전단지 등을 만들어 배포하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이 지시에 따라 웨그먼스는 식품이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재배됐으며, 어떤 조리법이 좋은지 등 재밌는 정보를 연구해 고객들에게 알려준다.

웨그먼의 고객 중심 마인드는 웨그먼스의 문화가 됐다. 한 고객이 추수감사절에 쓸 칠면조가 너무 커 집에 있는 오븐에 들어가지 않는다며 어쩔 줄 몰라하며 웨그먼스를 찾았다. 웨그먼스의 요리사는 매장에 있는 오븐을 이용해 칠면조를 구워줬다.

웨그먼스 직원들이 고객들에게 이처럼 헌신적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직장에 대한 만족도가 높기 때문이다. 웨그먼 CEO는 직원들에게 “매뉴얼에 적힌 규칙에 연연하지 말고 각자의 판단에 따라 창의력과 재능을 발휘하라”고 말한다. 한 페이스트리 요리사에게 레스토랑에서 돈을 잘 벌다 웨그먼스에 온 이유를 물었다. 그는 “농담하십니까. 레스토랑에 있는 제 친구들은 모두 이곳으로 오고 싶어합니다. 레스토랑에서 일할 때보다 훨씬 창조적으로 일하고 있거든요”라고 답했다.

웨그먼 CEO는 직원들이 창의력을 키울 수 있도록 다양한 교육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정규직원에게는 4년간 매년 2200달러씩, 시간제 직원에게는 최대 1500달러씩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덕분에 1998년부터 매년 포천지가 선정하는 ‘가장 일하기 좋은 직장(Best Places To Work)’ 명단에 올랐다. 2005년엔 미국에서 가장 행복한 직장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웨그먼 CEO는 “직원들은 고객 만족을 위한 우리 자산 그 자체다. 그래서 우리가 가장 역점을 두는 것은 바로 직원들”이라고 강조했다.

전설리 기자 slj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