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봄, 마치 반가운 친구가 찾아온 것처럼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일이 있었다. 바로 ‘세시봉’으로 대표되는 노래와 정서가 사회적 화두가 된 것이다. 통기타와 청바지, 순수했던 추억들이 떠올랐다.

무엇이 ‘세시봉’을 과거에서 현재로 불러낸 것일까? 필자가 젊은이 소리를 듣던 때 유행하던 것이 왜 다시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됐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요즘 세대들이 송창식과 윤형주, 이장희 같은 명가수들의 음악을 이해할 수 있을까? 오히려 차이를 느껴야 정상인데 말이다.

그리고 얼마 전 딸아이가 들려준 ‘여수밤바다’라는 노래를 접하고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누구의 것이냐고 물으니 발음하기조차 어려운 ‘버스커버스커’라는 젊은 가수의 노래라고 했다. 이 구성진 가락과 노랫말이 요즘 세대들 사이에서 가장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처럼 때로는 ‘공감(共感)’이라는 개념이 시간의 틀 속에 갇혀 있는 ‘세대(世代)’를 관통하는 듯하다. 문화인류학이나 사회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세대’를 분류하고 그것을 하나의 덩어리로 묶어 정의하는 것을 즐긴다. ‘베이비붐세대’를 시작으로 ‘X세대’ ‘386세대’ ‘88만원세대’ 등 갖가지 세대가 등장하더니 최근에는 영화 제목에서 따온 ‘건축학개론 세대’라는 말도 나왔다고 한다. 주로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라, 가끔은 학문적 요구에 의해 세대를 정의해 온 까닭인지 ‘OO세대’는 언제나 그 시대의 젊은이들을 지칭해왔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며 삶을 공감할 수 있다면 이런 구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세시봉의 귀환이 반가운 것은 단순히 그 시절의 추억이 아름다웠거나 행복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신세대와 기성세대가 문화적 공감을 찾았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기업의 CEO로서 직원과 협력사, 고객 등 수많은 이해관계자들과 소통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곤 한다. 결과를 위해 과정을 무시하지는 않았는지, 상대적으로 높은 직책 때문에 권위주의의 함정에 빠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될 때도 있다.

이 모든 물음에 대한 답은 역시 공감에 있다. 세대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정서가 서로에게 위로와 격려를 줄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다니는 회사는 10여년 전부터 신제품 출시 단계에 젊은 고객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소비자 제품 평가단’을 운영하고 있다. 또 작년부터는 상생협력위원회를 만들어 가맹점주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고 있다. 이런 시도가 단시간에 눈에 보이는 성과를 안겨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공감이란 일시적 주장이나 설명만으로는 추구할 수 없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눈높이를 맞추고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경청할 때 비로소 자연스럽게 우러나올 것이다. 이번 여름에는 손자 녀석을 데리고 여수 앞바다에 다녀와야겠다.

조상호 < SPC그룹 총괄사장 schcho@spc.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