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선 철도 동백산에서 도계 구간에 솔안터널이 개통되면서 철로를 지그재그로 운행하는 이른바 스위치백(switch-back) 철도가 50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고 한다. 원래 구간은 험준한 산악지대로 곡선이 심하고 건설한 지 오래 돼 붕괴 우려가 있어 정부가 열차 안전운행을 확보하기 위해 이 사업을 추진했다고 한다. 국토부 관계자는 “기존 구간에 설치된 스위치백 구간 선로는 폐쇄하지 않고 향후 추억체험 등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나마 다행이지만 영동선의 명물 하나가 운행을 멈추었다니 아쉽기만 하다.

21세기에 들어와 자꾸 사라지는 것으로 ‘간이역’이 있다. 자그마한 시골역사는 이제 ‘편지’ 같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향수 어린 장소가 되고 말았다. 김천 촌놈인 나는 방학이 돼 대구 할머니 댁에 갈 때면 기차를 타야 했는데 대구역은 열 번째 역이었다. 열차는 정시에 출발하는 법이 없었고 정시에 도착하는 법도 없었다. 잘 가다가도 무궁화호 같은 빠른 열차가 지나가게 되면 멈춰 서서 지나가기를 기다려줘야 하는데 그것이 10분일 때도, 20분일 때도 있었지만 다들 그러려니 했다.

야간열차의 추억은 아름답고도 슬프다. 기침을 하면서도 담배를 계속 태우는 할아버지, 자식과 헤어진 것이 서러운지 연신 눈물을 닦는 할머니, 소주잔을 기울이며 농사 얘기에 여념이 없는 중년 아저씨, 아기가 울자 젖을 꺼내 물리는 젊은 어머니, 열차 통학생은 간간이 졸지만 휴가 나온 장병은 계속 잠만 자고…. 간이역에는 내리는 사람이 한 열차 칸에 겨우 한두 명이다. 중절모를 쓴 중년 아저씨들이나 한복치마를 입은 아줌마들의 뒷모습이 왜 그리 하나같이 눈물겨웠을까. 대개 농사를 수십 년 짓다 보니 허리가 휘어서 그리 보였을 것이다. 이제는 낡은 가방을 들고 내리는 어르신네나 보따리를 이고 내리는 아낙의 뒷모습도 볼 수 없다. 그분들 중 많은 이가 지금 이 세상에 안 계시리라.

열차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는 삶은 달걀을 먹는 것이었다. 소풍 때나 운동회 때가 아니면 삶은 달걀을 먹을 수 없었는데 열차여행 때면 아버지가 달걀을 사주셨다. 아아, 너무너무 맛있어 물이 없어도 먹을 수 있었다. 두 개도 세 개도 먹을 수 있었다.

가다 보면 열차가 괘액~ 경적을 힘차게 울려 잠든 마을을 깨운다. 그때마다 아, 내가 기차를 타고 여행하고 있구나 생각하면서 다시금 행복에 잠긴다. 터널을 통과하는 것이 제일 싫었다. 고약한 냄새가 차내로 들어와 한동안 빠져 나가지 않기 때문이었다.

현대는 속도를 중시하고 느림을 혐오한다. 시인들이 여기에 반대를 표하기로 했다. KTX 등장 이후 전국적으로 사라지고 있는 간이역을 소재로 한 시만 모아 시집을 내기로 했다. 그래서 내게 된 시집이 간이역 간다이다. 우리에게는 사라지는 것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하지 않은가, 반성하는 의미에서 각자 새롭게 시를 쓰면서 추억 속의 열차와 간이역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졸시가 이 시집에 나온다.

‘내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가는 것들은 애처롭고/ 이 세상 모든 애처로운 것들은 아름답다/ 간이역에서 내리는 사람은 단 둘/ (중략) 김천-대신-아포-구미-사곡-약목-왜관-연화-신동-지천-대구/ 열 번째 대구역까지 가는 동안/ 두세 번은 꼭 쉬어 빠른 열차를 통과시키고 떠났었지/ 하염없는 기다림/ 간이역은 기차를 기다리며 늙어가고/ 기차는 늘 간이역에서만은 서둘러 떠난다.’

왜관역 근처에는 끊어진 철교가 있었다. 6·25전쟁 때 끊어진 철교를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두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그 철교를 가리키면서 ‘낙동강방어전투’와 ‘왜관전투’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이 강이 온통 붉은 피로 물들어 흘러갔었다는 낙동강. 나는 겁에 질려 6·25 때 훈련소 교관이었던 아버지의 말에 귀를 쫑긋 기울였었는데 이제 아버지도 저 세상으로 가 6·25 때 얘기를 해주실 분이 주변에 없다. 열차여행과 간이역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또 하나의 이유다.

이승하 < 시인·중앙대 교수 shpoem418@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