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 그대를 보지 않고는 하루도 살 수 없다오. 그럴 수 없다면 끔찍한 광란이 있을 뿐이오. 나는 더 이상 작업할 수 없다오. 얄미운 당신. 그렇지만 미치도록 당신을 사랑하오…당신의 모습을 매일 볼 수 있게 해주오. 오직 당신의 관대함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오.

스물네 살 연하의 제자를 사랑하게 된 조각가 로댕(1840~1917)의 눈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1883년 친구 알프레드 부셰가 로마로 떠나면서 맡긴 조각 레슨에서 처음 만난 카미유 클로델(1864~1943). 이 19세의 조숙하면서도 매혹적인 제자에게 로댕은 완전히 백기를 들고 말았다. 클로델이 없는 생은 무의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는 순식간에 사랑의 늪에 빠져들었다.

로댕은 사랑하는 제자와 함께 있는 시간을 더 늘리고 싶은 나머지 이듬해 클로델을 ‘지옥의 문’ 제작을 위한 조수로 고용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것이 불행한 사랑의 출발점이 되리라는 것을 알 턱이 없었다. 둘은 또 다른 지옥의 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로댕은 클로델로 하여금 제작을 보조하는 업무뿐만 아니라 모델을 서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눈부신 아름다움을 영원히 돌 속에 고정시키고 싶은 조각가로서의 본능에 따른 것이었다. 클로델의 솜씨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을 거듭했고 로댕은 그런 제자에게 작품의 중요한 부분을 직접 제작하도록 맡겼다. 둘의 작품은 누구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뒤섞여 버렸다. 물론 두 사람의 몸과 마음도 분리할 수 없는 일체로 나아가고 있었다.

만난 지 3년이 되던 1886년 로댕은 클로델에게 6개월간의 이탈리아 여행을 끝낸 후 아내로 맞이하겠다는 맹세를 담은 편지를 보낸다. 복잡한 여자관계로 유명했던 로댕이 이 깜찍한 제자에게 얼마나 푹 빠져 있었는지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로댕의 명작 ‘키스’(1886)와 클로델 최고의 명작으로 프랑스 예술인 상을 수상한 ‘사쿤달라’(1888)는 이 시기 두 사람의 사랑이 이뤄낸 값진 예술적 결실이다.

그러나 결혼을 약속한 두 사람 사이는 1892년을 전후해 점차 파국으로 치달았다. 로댕은 이 드세고 독점욕이 강한 여인에게 점차 부담을 느꼈고 클로델은 결혼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로댕에 대한 반감을 점차 키워 나갔다. 가장 큰 걸림돌은 로댕과 20년 넘게 동거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로즈 뵈레라는 여인이었다. 로댕이 결코 이 여인과 갈라서지 않으리라는 점을 감지하면서 클로델의 질투는 증오심으로 변해갔다. 클로델은 그런 격분의 감정을 자신의 작품에 쏟아부었다. 그럴수록 로댕은 이 여인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고 사랑의 감정도 식어갔다.

둘은 더 이상 함께 작업하지 않음은 물론 다시는 서로 얼굴을 마주치지 않는다. 클로델은 로댕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떨었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함으로써 로댕에게서 독립하려 했다. 그러나 로댕은 소리 없이 클로델의 독립을 지원했다. 후원자를 물색, 클로델에게 주문하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이런 선의는 되레 클로델이 로댕의 ‘판박이’라는 입방아를 부추겼고 클로델의 분노를 더욱 키울 뿐이었다. 그는 로댕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배신감과 증오심을 담아 ‘중년’이라는 작품을 제작한다. 한 중년 남자가 무릎 꿇고 애원하는 젊은 여인을 뿌리치고 나이 든 여인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담은 작품이었다. 누가 봐도 로댕과 뵈레를 풍자한 것이 분명했다. 정부는 당시 이미 거물이 된 로댕을 의식, 작품 구매를 거절했다.

다행히 클로델은 나름대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아르튀르 드 매그레 백작부인 같은 든든한 후원자도 만난다. 독립의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행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1906년 그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해주던 남동생 폴 클로델이 결혼과 함께 중국으로 떠나버리자 깊은 좌절감에 빠진다. 이때부터 클로델은 자신의 작품들을 파괴하고 작업실에 칩거한다. 그런 가운데 정신착란의 독버섯이 거침없이 자라났다. 그는 로댕이 자신을 살해하려 한다는 망상의 포로가 되고 만다. 화상 외젠 블로가 그를 도우려 했지만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클로델의 마음을 되돌리기에는 때가 늦었다.

1913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평소 클로델의 처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어머니는 그를 정신병원에 유폐시킨다. 외교관이었던 폴 클로델도 자신의 앞날에 누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는지 누이의 감금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렇게 클로델이라는 천재는 주변의 몰이해와 무심한 세월속에 잊혀져갔다. 한때의 사랑이 가져온 결과치곤 너무나 참혹하지 않은가.

사랑이 없으면 미움도 없다. 사랑이 없으면 증오도 없다. 둘은 어쩌면 종이 한장 차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종이 한장 차이가 극과 극의 결과를 가져온다. 때로 그것은 행복과 비극의 갈림길이 된다. 클로델은 증오의 강을 너무 깊게 판 나머지 자신의 육신마저 가둬버린 비련의 주인공이 됐다. 클로델은 ‘비극의 터널’에서 영영 빠져 나오지 못했지만 그 속에서 탄생한 작품들은 1980년대 이후 재평가받아 다시금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다. 그의 비극적 삶을 보면서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영원하다는 진리를 새삼 되새기게 된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