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출신 난민으로 어린 시절 스페인의 고아원, 푸에르토리코의 친척집 등을 전전했다. 22세에 뉴욕으로 갔지만 사회의 소수자로 살 수밖에 없었다. 유색인종이란건 그렇다 쳐도 동성애자에다 에이즈(AIDS) 환자였기 때문이다. 39세의 짧은 생애 중 딱 10년간 미술활동을 했다. 그리고 현대미술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작가들에게 번뜩이는 영감을 준다고 해서 ‘예술가들의 예술가’로 불리는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1957~1996) 얘기다.

그는 동성(同性)의 애인 로스 에이콕이 에이즈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또 자신도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 극도의 외로움과 두려움에 시달렸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에선 만남과 이별, 삶과 죽음이 끊임 없이 변주된다. 이를테면 벽시계 두 개를 나란히 건 작품 ‘무제-완벽한 연인들’은 전시 시작과 동시에 시침 분침 초침이 똑 같이 맞춰진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다른 시각을 가리키다가 언젠가는 한 시계가 먼저 수명을 다해 멈출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 함께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삶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두 사람이 함께 침대에 누워있던 흔적을 찍은 흑백사진은 1991년 애인 로스가 죽은 해에 제작됐다. ‘빌보드’(Billboard·옥외 광고판)라는 부제의 작품이다. 구겨지고 흐트러진, 텅 빈 공간에서 연인을 잃은 후의 깊은 공허를 읽을 수 있다. 관람객이 참여해야 완성되는 작품도 있다. 전시장 바닥에 은색 셀로판지로 싼 사탕 500㎏을 사각형으로 깔아 놓은 ‘무제-플라시보(placebo)’가 대표적이다. 관람객들이 사탕을 하나둘씩 집어 가도록 했기 때문에 사탕더미는 조금씩 줄어들다가 마침내 없어지고 만다. 사탕더미처럼 삶도 덧없다는 것의 은유다.

토레스의 아시아 첫 회고전이 서울 태평로 삼성미술관 플라토에서 9월28일까지 열린다. ‘완벽한 연인들’ ‘플라시보’ 등 모두 44점이 나와 있다. ‘빌보드’는 삼성 태평로빌딩, 명동 중앙우체국 옆, 신촌역 부근, 지하철 6호선 한강진역 등 6곳에 광고판처럼 설치돼 주변을 오가다 볼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재료, 설치안내서, 보증서 등으로 이뤄진다. 소장가나 큐레이터가 개입해 변형시킬 수 있는 구성이다. 어떤 면에선 비슷하게 흉내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데도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다. 토레스는 생전 “최선을 다해 산 인생이야말로 최고의 복수”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이 세계 곳곳에서 끊임없이 재생 전시되고 있으니 멋지게 복수를 하고 있는 셈인가.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