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만, 장인에게 소송을 걸어 사랑을 쟁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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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사랑 (5)
법학공부 흥미 잃고 방황하다 어린 소녀 클라라 연주에 매료
음악가로서의 새 인생 출발
장인의 모진 반대 물리치고 웨딩마치 올린 세기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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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가로서의 새 인생 출발
장인의 모진 반대 물리치고 웨딩마치 올린 세기의 사랑
“흥, 내 딸을 저런 빈털터리한테 내주다니. 말도 안 돼. 게다가 저 소문난 바람둥이한테 내 아름답고 정숙한 딸을 시집보낼 수는 없어.”
라이프치히 최고의 피아니스트 조련사인 프리드리히 비크는 요즘 잠을 이룰 수 없다. 로베르트 슈만(1810~1856)이라는 제자가 자신의 딸을 노골적으로 유혹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둘의 관계는 이미 심각한 상태로 발전한 뒤였다. 뭔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죽 쒀서 개 주는 사태가 빚어질 게 분명했다.
비크는 새로운 피아노 교수법을 개발, 한창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그는 신동을 조기에 발굴, 스파르타식으로 조련해 최고의 스타로 키워나가는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었다. 19세기 초 클래식 공연은 서서히 돈 되는 블루오션으로 떠오르고 있었고 비크는 그런 흐름을 꿰고 있었다. 친딸인 클라라 비크(1819~1896)는 그중에서도 그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 클라라는 이미 11살 때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공연할 정도로 탁월한 재능을 보이고 있었다.
비크는 야심가이자 셈이 빠른 작자였다. 그는 돈벌이라면 뭐든 개의치 않는 사람이었다. 취미로 피아노를 치려는 아마추어 애호가들을 위한 레슨도 마다하지 않았다. 라이프치히대학 법학도인 슈만도 그의 일반인을 위한 강좌에 참석했던 수강생 중 한 사람이었다. 슈만이라는 청년은 한창 음악에 심취, 음악가로서의 삶을 고민하던 차였다. 학문과 예술을 사랑했고, 여자에 탐닉했던 슈만에게 딱딱한 법학은 소화불량을 일으킬 뿐이었다. 한번은 비크가 자신의 딸 클라라에게 수강생들 앞에서 시범을 보이게 했는데 슈만은 어린 소녀의 현란한 솜씨와 아름다운 자태에 넋을 잃고 말았다. 슈만은 마침내 긴긴 방황을 끝내고 비크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비크도 이 젊은 친구가 리스트를 능가할 비범한 재능의 소유자라는 점을 한눈에 알아차렸다. 그는 슈만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하면서 특별 조련에 들어갔다. 슈만과 클라라가 서로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이때였다. 슈만은 클라라를 자신의 어린 여동생처럼 아꼈고 클라라도 이 재능 넘친 훈남에게 존경의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20살 청년과 11살 소녀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 리는 만무했다.
한편 슈만은 너무 연습에 열중한 나머지, 오른손에 마비 증상이 나타난다. 안타깝게도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어야 했다. 고심 끝에 그는 작곡가의 길로 방향을 튼다. 이때부터 비평에도 손을 대기 시작한다.
5년의 세월이 흘러 클라라는 소녀티를 벗고 뭇 남성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한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도 점차 연인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1835년 11월 말 둘은 처음으로 격렬한 입맞춤을 나눈다. 이날 밤 클라라는 자신의 일기장에 어떤 난관이 닥치더라도 슈만과 함께 하기로 결심했다고 적었다. 처음에 둘은 순탄하게 가약을 맺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야심가인 비크는 둘의 결혼에 거세게 반대했다. 비크는 수입이 일정치 않은 풋내기 음악가에게 자기 딸을 줄 수 없었다. 클라라는 이미 피아니스트로서의 명성을 다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미모도 출중해 얼마든지 괜찮은 사위를 맞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슈만이 재를 뿌린 셈이었다. 그렇지만 이미 불붙은 두 청춘남녀를 떼어내기 위해 쓸 수 있는 카드는 많지 않았다.
‘아웃 오브 사이트, 아웃 오브 마인드(눈에 보이지 않으면 잊혀진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격리가 최선이었다. 비크는 처음에는 클라라를 드레스덴으로 떠나보내고,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안됐던지 독일로, 빈으로, 프라하로 연거푸 연주여행을 떠나보냈다. 그러나 강력한 사랑의 힘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아버지가 훼방을 놓으면 놓을수록 둘의 사랑은 더욱 단단해졌다. 두 연인 사이에 눈물 젖은 서신이 수도 없이 오고갔다. 그 애절한 사연은 그대로 슈만의 오선지 위에 흔적을 남겼다.
1837년 슈만은 비크에게 공식적으로 결혼의 승낙을 요청했지만 깐깐한 야심가의 태도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슈만은 어쩔 수 없이 법정에 호소하는 마지막 카드를 꺼낸다. 슈만은 재판정에 선행증명서와 예나대학에서 받은 박사학위증을 함께 제출했다. 법정은 결국 젊은 연인들의 손을 들어줬고 둘은 마침내 1840년 8월1일 쇠네펠트에서 웨딩마치를 울린다.
사랑의 위대한 힘을 슈만과 클라라의 경우만큼 잘 보여주는 경우도 드물다. 그는 결혼한 해에 무려 138곡의 가곡을 쏟아냈다. 평생 작곡한 가곡의 절반이 이 사랑의 고뇌 속에서 만들어졌다. 명 연가곡인 ‘여인의 사랑과 생애’ ‘시인의 생애’가 모두 이때의 작품이다. 또 첫 교향곡 ‘봄’은 신혼의 단꿈 속에서 탄생했다. 슈만에게 클라라는 창작의 샘을 분출시킨 뮤즈였다. 그는 남편의 음악을 자신의 공연에서 계속 연주, 슈만이 명곡을 쏟아낼 수 있게 했다. 덕분에 우리는 그 음악을 들으며 달콤한 사랑의 기쁨과 슬픔에 젖어든다. 예술가의 사랑은 이래저래 온 세상에 축복이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