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인수·합병(M&A) 시장에서 ‘외국자본의 대항마’로 도입된 사모투자펀드(PEF)가 기묘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PEF는 기업 경영권을 획득한 뒤 구조조정을 통해 기업가치를 높여 되파는 사모펀드를 말한다. 도입 7년 만에 200개를 넘어섰다. 투자약정 금액도 34조원을 웃돌고 있다.

양적으로 가파르게 성장했지만, PEF 자금이 투자된 내역을 들여다보면 도입 취지가 머쓱해진다. 원래는 구조조정이 진행되거나 경쟁력이 저하된 중견·중소기업을 회생시키는 데 기여하자는 취지였다. 정책금융공사와 국민연금 등이 수조원의 자금을 PEF에 투입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PEF 자금은 대기업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벤처캐피털 1위업체 스틱인베스트먼트는 정책금융공사 자금으로 조성한 PEF로 현대중공업 계열 현대오일터미널에 330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스틱인베스트먼트는 포스코 계열 포스코에너지가 2000억원 규모로 추진 중인 유상증자의 우선협상자로도 선정됐다. 중소기업 육성을 위해 설립된 정책금융공사의 정책자금을 받아 대기업 계열사에 투자하는 셈이다.

대기업이 M&A에 나설 때 PEF가 측면 지원에 나선 지는 오래 됐다. 이 과정에서 금호아시아나그룹을 위기로 몰아넣은 주범이었던 풋백옵션(정해진 가격에 주식을 되파는 권리)이란 안전장치는 여전하다. 대기업들은 M&A나 자금조달에 나설 때 PEF들을 줄세우는 실정이다. 은행들은 “PEF가 대기업에 대출이나 인수금융을 해주고 있다”며 볼멘 소리를 내고 있다.

어쩔 수 없다는 게 PEF업계의 항변이다. 한 PEF 임원은 “경영권을 사고 파는 바이아웃 투자를 하는 PEF는 국내에 3~4곳밖에 없다”며 “전문성이 부족한 상황에서 안정적으로 투자하려면 대기업과 관련된 투자를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PEF 자금을 댄 주요 투자자들이 감사원 감사를 받는 곳이다보니 풋백옵션 등을 요구하고, 투자한 지 2년만 지나도 회수에 나서라고 압박한다”고 귀띔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PEF가 위험을 감수하면서 중소기업 회생을 위해 투자하기보다는 안전한 대기업 투자를 선호하고 있지만, 법적으로 막을 길은 없다”고 말했다. 양적으론 성장했지만 질적으론 초보수준인 PEF의 현실이다.

조진형 증권부 기자 u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