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유로숍·로또 판매점에 긴 줄…마드리드 주택가 곳곳 '임대' 팻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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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 '금융위기' 스페인을 가다 (上)
부실은행 상징 방키아 앞 광장에선 분노한 청년들의 시위가…
초호화 해변도시 아파트값 반토막
부실은행 상징 방키아 앞 광장에선 분노한 청년들의 시위가…
초호화 해변도시 아파트값 반토막
그리스 2차 총선 다음날인 18일 아침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의 금융중심지인 카스테야나 거리. 스페인 2, 3위 은행인 BBVA와 방키아 본사가 있는 이곳에선 직장인들이 손에 신문을 쥔 채 출근을 서두르고 있었다. 신문 1면 헤드라인은 ‘그리스가 유럽을 안심시켰다’. 전날 그리스 신민주당의 승리를 앞다퉈 담았다. 출근길에 만난 금융 컨설팅업체 ARA의 알베르토 베르가스는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의 결속이 강화되고, 스페인에 대한 글로벌 시장의 우려가 완화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하지만 베르가스의 기대가 깨지는 데는 채 몇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전 채권시장이 개장하자 스페인 10년물 국채 금리는 구제금융의 마지노선이라는 연 7%를 넘었다. 그리스 총선으로 한숨 돌리는가 했던 스페인이 오히려 위기의 진앙지로 부상하는 양상이다. 출근길 스페인의 맑았던 하늘은 금융시장을 반영하듯 점심시간을 지나면서 먹구름이 드리우고 소나기까지 쏟아졌다.
스페인의 경기침체는 마드리드 곳곳에서 나타났다. 번화가에 있는 마드리드 최대 백화점 ‘엘 코르테 잉글레스’는 이달부터 여름맞이 일부 세일에 들어갔지만 손님을 찾기 힘들 정도다. 1층 화장품 매장 직원인 마리아 루이사는 “매출이 지난해 세일기간의 절반도 안 된다”고 토로했다. 고객들은 대신 외곽 주택가 주변의 저가 중국제품 잡화점인 ‘1유로숍’으로 몰리고 있다. 스페인에서 유일하게 호황인 상점은 로또 판매점뿐이다. 복권 구입을 위해 길게 늘어선 줄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부동산 위기를 반영하듯 마드리드 중심 주택가 베란다에도 곳곳에 ‘임대(alquilar)’ 팻말이 세워져 있다. 최근 스페인의 경제위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곳이 마드리드 동남쪽으로 400여㎞ 떨어진 해변 도시 토레비헤하다. 10여년 전만 해도 조그만 해변의 중소도시였지만 어느새 부동산 투자 광풍을 타고 아파트들이 대거 들어섰다. 스페인 중산층들이 앞다퉈 매입한 것이다. 은행들은 경쟁적으로 대출에 나섰다. 아우스방크(스페인 은행이용자협회)의 루이스 피네다 살리도 회장은 “은행들이 앞다퉈 돈을 내주다 보니 대출액이 담보 가치의 100%를 넘는 경우도 허다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거품은 유로존 위기가 불거지면서 터졌다. 80㎡ 기준 20만유로 안팎이던 토레비헤하의 아파트 가격은 10만유로 밑으로 반토막이 났다. 부동산 가격 폭락은 은행의 대출 부실로 이어졌다. 은행의 부실은 산업 침체, 실업률 상승, 대출 상환 불능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았다. 지난 4월 말 기준 실업자 수는 530만명으로 실업률이 24.3%에 달한다. 청년 실업률은 50%에 육박하고 있다.
스페인 부실 은행의 상징이 된 방키아 앞 광장에선 청년들의 시위도 볼 수 있었다. 손에는 스페인 정부와 지방 정부를 비난하는 팻말을 들고 있었다. 방키아 앞에서 반정부 시위를 하고 있던 대학생 미겔 라브레스는 “스페인 정부와 국민들이 눈과 귀를 막고 원하는 것만 보고 듣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말처럼 이날 스페인의 국채 금리는 연 7.16%(종가 기준)를 기록하며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지만 스페인은 오히려 축제 분위기였다. 이날 폴란드에서 열린 스페인과 크로아티아의 경기를 전광판을 통해 지켜보기 위해서다. 스페인이 8강 진출을 확정하는 골을 넣자 환호성이 마드리드에 울려퍼졌다. 경제위기를 보도한 신문들을 찢어 경기장의 종이 꽃가루로 쓰는 현지 코카콜라의 TV 광고처럼, 축구는 이날 스페인 사람들에게 어려운 현실을 잊기 위한 환각제가 됐다.
마드리드=고경봉 기자 kildon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