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수 한국은행 총재가 어제 한은 창립 62주년 기념사에서 ‘케인시안 포퓰리즘’을 경고한 것은 주목할 만한 장면이다. 정부가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한다는 케인스식 정책의 유효성에 깊은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기존의 금융통화 정책에 대해서도 깊은 고민을 드러냈다. 김 총재는 “양적완화를 실행해도 금융회사의 건전성지표만 개선될 뿐, 실물로 전파되지 않는다”며 “현재 위기가 미국·유럽의 자체 성장력 회복 없이 어떤 방안으로 해결될 수 있는지 심각하게 분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경제위기가 언제 종료될지 막연하고, 위기종료의 조건조차 명확하지 않다”는 토로는 통화정책의 최고책임자로서 갖는 깊은 좌절감을 표현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케인시안 포퓰리즘이라는 단어는 특히 놀랄 만한 조어다. 무조건 돈을 더 풀라는 포퓰리즘의 압력에 직면해 있는 통화책임자로서 갖는 고민을 이 단어로 적절히 지적했다고 본다. 위기 해법을 찾아야겠지만 양적완화로 요약되는 케인시안 포퓰리즘은 결코 답이 될 수 없다는 자기고백이요, 판에 박은 듯한 정부 정책에 대한 치열한 비판이다. 선진국들이 과거 같으면 유동성 함정을 우려했을 정도의 초저금리 상태에서 장기간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도 그렇다. 그렇기에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경제학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한다는 사실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라는 지적도 단순한 수사학은 아닐 것이다.

김 총재의 연설은 낡은 것에 대한 무력감과 새로운 이론은 안갯속인 데서 오는 답답한 심정을 잘 드러냈다. 소위 첨단 파생상품에 대한 김 총재의 고민 역시 공감하는 바가 크다. 분포의 꼬리 부분에서 발생하는 위험도 그렇지만 파생시장의 논리가 “우리를 지적으로 압도하고 있다”는 언급은 김 총재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중앙은행 총재가 고민하는 같은 문제일 것이다. 모처럼 중앙은행 총재에 걸맞은 수준 있는 연설을 듣게 되었다. 깊은 고뇌가 담긴 김 총재의 연설은 비록 완곡어법으로 겹겹이 포장돼 있기는 하지만 지금 정치권에 던지는 결코 가볍지 않은 경고이기도 할 것이다. 포퓰리즘에 골몰하는 정치권엔 아예 귀가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