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로 연말에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았던 1997년은 김영삼 정부 시절 막판 혼란으로 연초부터 뒤숭숭했다. 기업자금을 제 돈처럼 꺼내 쓰던 부도덕 한보그룹과 전문경영 문패 뒤에 숨어 정치권과 노조 비위 맞추기에 급급했던 무책임 기아그룹이 빚더미만 남기고 쓰러졌다.

외환위기의 직접적 원인은 금융부실이지만 금융권을 위기로 내몬 것은 대규모 기업부실이다. 고객예금으로 대출을 집행하는 금융회사가 기업도산으로 지급불능에 빠지면 예금보호 의무를 짊어진 정부가 국민 세금으로 대신 물어준다. 금융부실을 미리 알아챈 외국자본이 잽싸게 빠져 나가면서 환율폭등과 외화고갈 사태가 유발된 것이다.

외환위기 여파로 과잉투자가 심각했던 자동차산업은 초토화됐다. 현대차를 제외한 기아차 쌍용차 삼성차 대우차가 순차적으로 쓰러졌다. 기아차는 국민기업 명분의 구명운동과 부도유예협약이라는 변칙적인 조치까지 동원됐으나 결국 정리절차를 밟았다. 쌍용차는 대우차로 넘어갔다가 다시 분리돼 떠돌았고, 삼성차와 대우차는 대우전자 부실처리와 연계한 정치권 빅딜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기아차 사태는 현대차 컨소시움의 인수로 조기에 수습됐다. 현대차그룹은 부실로 엉망인 기아차에 계열사를 통해 막대한 자금을 투입했다. 기아차 인수 첫해인 1998년 매출액은 4조5000억원이었으나 작년에는 43조원으로 15년간 연평균 성장률 16.2%를 달성했다. 기아차가 얻은 이익은 계열사로 재투자돼 결과적으로 순환출자 지배구조가 형성됐다.

현대차그룹의 순환출자로 인해 대주주 일가의 실질 지분율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그 결과 현대차그룹이 얻은 기적적 성과에 대한 대주주 몫은 줄었고 경영을 위임한 투자자가 대박을 터뜨렸다. 순환출자는 주주 간의 관계로 투자에 참여한 다른 주주가 높은 수익을 기대해 경영을 위임했다면 문제될 일이 아니다. 정치권과 일부 시민단체 시각과는 달리 주식시장에서는 순환구조인 현대차와 삼성계열의 선호도가 매우 높다. 최근 삼성에버랜드는 순환출자 해소를 위해 5000억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을 완료했는데 수익성 높고 투자기회가 풍부한 우량 대기업이 보유자금을 투자재원 대신 자사주 매입에 충당하면 일자리는 어떻게 만들지 걱정이다.

일자리가 사라질 절박한 위기 순간에 현대차그룹에 고용승계된 기아차 근로자는 정상화와 함께 높은 임금이 보장됐고 배정된 우리사주로 큰 이익을 얻었다. 기아차보다 부실이 덜했던 쌍용차 등 다른 차 회사는 외국기업에 경영권이 넘어간 후에도 판매부진과 고용불안이 계속됐다. 쌍용차는 중국과 인도 기업 손을 오가며 계속 위축돼 기아차 매출의 6%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대우차는 GM대우 브랜드로 국내 시장점유율 10% 수준으로 주저앉았고, 삼성차를 인수한 르노그룹은 거액의 로열티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삼성로고를 부착하면서 국내 시장점유율 5~7%를 유지하고 있다.

복직을 기다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쌍용차 근로자 분향소가 계속 설치되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한국GM의 강압적 희망퇴직에 반발하는 노사갈등이 첨예하고 르노삼성은 재고누적으로 한 달에 보름만 공장을 가동하는 비상경영에 나섰다. 국내에서 기아차 K9을 사려면 두 달을 기다려야 하고 미국 조지아 기아차 공장은 3교대로 운영하면서 신규인력 800명을 추가로 채용했다는 소식과는 완전 딴판이다.

일자리를 찾는 청년들의 몸부림이 처절한데 정치권은 철 지난 재벌개혁 레코드판을 다시 틀고 있다.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義)로 인기몰이에 나선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가 박원순 서울시장 손에 이끌려 쌍용차 분향소를 방문했다. 활기 넘치는 기아차 공장은 빼놓고 비극 현장으로 안내한 박 시장의 자해적 선택이 원망스럽다.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과 함께 기아차 조지아 공장은 미국 남부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다. 샌델 교수는 한국까지 올 것 없이 기아차 조지아 공장을 찾아 피터 드러커 교수가 세계 1등이라고 극찬한 한국인의 기업가 정신을 살피고 일자리 창출이 기업가 정의의 핵심임을 실감하기 바란다.

이만우 < 고려대 경영학 교수 / 객원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