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두 군데 학교를 나가고 있다. 선생님이 아니라 학생으로. 집 근처 도서관에서 영어회화 강좌를 듣는데 수업은 1주일에 이틀. 출석체크도 능력시험도 없지만 꽤 열심히 출석하는 편이다. 초급반이지만 수업은 결코 만만치 않다. 오래 전 외웠던 단어들은 혀끝에서 맴돌고 불규칙 동사변화는 외계어처럼 낯설어졌다.

프리토킹 시간이면 연결되지 않는 문장 앞에서 좌절하기 일쑤지만 모두들 콧잔등에 땀이 송송 솟아난 채로 머리를 쥐어짜기에 여념이 없다. ‘내가 만약 새라면 당신에게 날아갈 텐데’ 같은 추억의 문장을 배울 때면 마음만은 가정법을 배우던 시절로 단숨에 훌쩍 날아간다. 숙제 안해왔다고 선생님께 잔소리 듣는 일마저 이리 즐거울 줄은 몰랐다.

주로 생활밀착형 회화를 하다보니 자연스레 나이와 직업, 성격 등이 드러나게 되는데 캐릭터들이 어찌나 아롱다롱한지 소설가의 창작본능이 꿈틀거릴 지경이다. 출산휴직 중인 교사, 이민을 앞둔 젊은 엄마, 독일에서 오래 살다 돌아온 탓에 영어로 시작했다가 어느 새 독일어로 말하고 있는 수강생에다 수업을 따라가기 힘든 자신을 자책하다 그만 수업을 땡땡이치고 방황하다가 선생님께 붙들려오는 문제아(!)도 있다. 바쁜 아침 시간에 초콜릿 케이크를 구워오는 파티셰 지망생도 있으니 환상의 급우들이라 할 수 있겠다.

수업의 질문은 각자의 삶과 연결되고 학생들은 이번엔 존재론적인 질문 앞에서 고뇌한다. 지금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요? 열여덟 살로 돌아간다면 어떤 삶을 살고 싶나요? 첫사랑이 갑자기 연락해온다면 당신은? 학생들은 이런 질문 앞에서 놀랍도록 솔직하게 자신의 내면을 털어놓는다. 아줌마 혹은 김 여사로 뭉뚱그려져 불리는 이들의 내면에 이토록 섬세하고 여린 감성과 열정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새삼 느끼는 시간이다.

여기에 더하여 주말엔 격주로 농부학교를 다니고 있다. 여기선 내가 불량학생이다. 아아, 농부학교라니. 배추벌레와 눈 한번 마주쳐보지 못한 주제에. 다른 학생들이라고 나을 게 없다. 베란다에서 겨우 상추나 키울 주거환경이 대부분이지만 이 학교 학생들 역시 학구열만은 만경평야라도 접수할 기세다. 아파트에 적합한 베란다농법도 배우지만, 도시양봉 강의를 듣고 친환경 비료도 만들어본다. 산야초를 직접 채취해서 효소 만들기도 하고 귀농탐색 수업을 듣기도 한다. 언젠가는 흙과 자연과 교감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수업을 듣지만 그게 꿈에 그친들 또 어떤가. 흙의 자장과 생명체의 자장은 파동이 매우 비슷해서 사람은 흙을 만지거나 흙냄새를 맡을 때 가장 심신이 평안해진다고 한다. 여기 더하여 숲 언저리에서 강의를 듣다보면 자연의 위대함과 모성을 흠씬 느끼고 돌아온다.

뒤늦게 학교의 재미에 푹 빠진 사람들이 주위에도 많다. 사회교육원에서 학구열을 불태우는 사람들도 있고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낯선 학교를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목공학교, 남미학교는 감이 잡히는데 얼마 전엔 울릉도 학교를 수료한 사람을 만났다. 음, 그게 뭔가요? 물어보았더니 신나게 설명을 했다. 그러니까 배를 타고 울릉도로 가서 나리분지를 등반하고 철썩이는 파도를 보며 바닷가를 걷고 울릉도의 식물분포와 역사를 공부….

요즘 뉴욕엔 술집에서 석학들이 뱀파이어 심리학부터 우주탄생의 비밀까지 즉석강의를 하는 술집학교가 유행이라니 학교의 경계가 무한 확장되었다고나 할까. 예술, 과학, 인문학…, 커리큘럼은 달라도 학교를 다니는 이들의 공통된 소감이 있다.

너무 재미있어요!

물론 공자님 말씀처럼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힌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당장 써먹을 게 아닌데도 없는 시간을 쪼개 학생의 자리에 앉아보는 건, 어쩌면 삶의 무게에 허리가 휘기 전, 공부 외엔 어떤 의무도 없었던 푸릇한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서는 아닐까. 내일이 오늘 같고, 지루한 숙제처럼 반복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금의 생을 긍정하며 동시에 변화해보려는 안간힘의 표현일 수도 있겠다.

정미경 < 소설가 mkjung301@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