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정치의 계절, 실종된 '성장'
한국 경제의 당면 문제는 무엇인가. 지금 ‘정치의 계절’에 제기된 것들을 보면 일자리, 복지, 경제 민주화 등이다. 과거 단골 메뉴였던 ‘성장’은 빠졌다.

그러나 과연 성장이 문제가 안 되는 것인가. 무엇보다 한국 경제의 문제는 성장률 하락 아닌가. 한국의 국내총생산 증가율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14년간 연평균 4.2%로서 위기 전 14년간 8.7%에 비해 반토막 났다. 경제 발전에 따른 성장률 하락은 당연하지만, 그런 추세보다 더 떨어진 것이다.

여기에다 진짜 주머니에 들어오는 국민총소득의 성장률은 더 많이 떨어졌다. 위기 전 14년간 국민총소득 증가율은 9.0%였지만, 위기 후 14년간은 3.2%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것도 있다. 위기 후 활짝 열린 한국 자본시장에서 외국인이 거둔 차익이 매년 수백억달러에 달하고, 그 일부는 실제로 빠져 나갔는데도 국민소득 계산에는 잡히지 않는다. 그것까지 감안하면 위기 후 한국의 국민총소득 증가율은 3%에 미달할 가능성이 크다.

결국 한국인의 국민총소득 증가율은 지난 십수년 사이에 9%대에서 2%대로 떨어진 것이다. 지금 한국인이 느끼는 경제적 스트레스의 근원에는 무엇보다 이런 성장률 하락이 있다.

거기에다 성장 잠재력도 약화됐다. 위기 처리과정에서 대규모 공적 자금을 투입하느라 재정상태가 악화되고, 대규모 구조조정을 겪으면서 출산율이 세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더 무서운 것은 사고방식의 변화다. 위기 후 대량 도산과 해고, 노동시장의 불안정을 겪으면서 한국인은 불확실성을 극도로 기피하게 됐다. 그것은 불확실성이 낮은 직업에 대한 선호로 나타났다. 불확실성이 낮은 직업은 결국 국가 권력에 기댄 직업이다. 공무원, 국영기업 직원 등 국가가 고용하거나 국가가 진입을 제한한 의사 변호사 교사 등이다. 반면 불확실성을 감당해야 하는 기업가나 과학기술자가 되려는 사람은 현저히 줄어들었거나 자질이 떨어졌다. 이런 경제의 장래가 역동적일 수 있겠는가.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국내총생산 증가율이 떨어진 것은 무엇보다 투자 부진 때문이다. 그렇다고 위기 전처럼 대기업의 ‘대마불사’식 투자에 의존하는 구도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일자리를 수반한 성장이어야 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결국 중소·벤처기업 육성을 통한 창업 활성화에 답이 있을 것이다.

국민총소득 증가율이 국내총생산 증가율보다 더 떨어진 것은 중국의 등장 등으로 원자재 가격이 올라 교역조건이 악화됐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해법은 산업구조를 자원 절약형으로 바꾸는 것이다. 외국인의 차익을 상쇄하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한국도 해외투자에서 수익을 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수밖에 없다.

성장 잠재력은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무엇보다 재정 건전성을 유지하고 출산율을 올려야 할 것이다. 그 방법은 잘 알려져 있다. 실질적 효과가 나는 방안이 시행되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국민이 불확실성을 기피하는 경향을 불식하려면 사회안전망, 즉 복지를 확대하는 동시에 공공부문을 개혁하고 전문직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춰 국가 권력에 기댄 직업의 프리미엄을 줄여야 한다. 그런 한편 기업가가 한 번 도전에 실패해도 재기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해 주고, 기업가를 ‘우리를 먹여 살리는’ 존재로 인정해 주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야 한다. 과학기술자에 대해서는 아마도 정부가 우수한 인재를 뽑아 평생 커리어를 관리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한국인이 ‘다시 뛰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일자리 없는 성장은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성장이 없으면 일자리도 없다. 복지가 중요하지만 그 재원은 성장에서 나온다. 복지 확대의 큰 의의는 사람들에게 장래에 대한 불안감을 줄여 줌으로써 그 사고방식을 바꿔 다시 뛰게 하는 데 있다. 경제 민주화도 비슷하다. 중소·벤처기업이 기를 펼 수 있도록 해줘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되도록 하는 데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알려진 과제를 제대로 해 내는 데 한국경제가 당면한 문제의 해결책이 있다. 정치권의 메뉴에 성장이 빠졌다고 성장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제민 < 연세대 경제학 교수 leejm@yonsei.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