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인터넷에서 우연히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 대한 동영상을 봤다. 학부모들과 영어 원어민 강사들을 모아놓고 반 총장의 영어 연설을 들려주며 실력을 평가해보라는 일종의 블라인드 테스트였다. 학부모들은 반 총장의 발음을 “촌스럽다”고 폄하하며 60점 이상을 주기 어렵다고 말했다. 반면 강사들은 “문장구조도 좋았고 내용이 분명해 의사 전달이 잘됐다”며 90점 후반의 점수를 주겠다고 했다. 흥미로웠던 것은 “형편없는 영어”라고 판단했던 학부모들이 정작 연설 내용은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는 점이다.

흔히 발음이 유창하면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글로벌 비즈니스에서는 다른 얘기인 것 같다.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는 사람 중에 완벽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니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이런 점을 서로 인정하고 의사소통의 정확성에 더 중점을 둔다. 발음의 유창함은 그 사람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더욱 돋보이게 하지만 원어민이 아닌 사람에게는 요원한 얘기다. 한국인은 한국인대로, 중국인은 중국인대로 각자 특유의 영어 발음이 있지만 그 사람의 발음이 이상하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거의 본 적이 없다.

비즈니스 영어를 잘 구사하려면 업무와 관련된 세부적인 표현을 익히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생각을 논리적이고 간결하게 표현하는 언어능력까지 갖추고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한번은 실력이 뛰어나다는 통역사와 함께 외국인들과 보험 상품 관련 회의를 한 적이 있었다. 통역사의 영어 구사 능력은 흠잡을 데가 없었지만 이 분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 보니 전체 내용의 60% 정도밖에 전달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회의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한 참석자가 보다 못해 통역을 자처하고 나섰다. 그는 다소 딱딱한 발음에 말도 더듬었지만 내용만큼은 정확히 전달했고 무사히 회의를 마칠 수 있었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한국적 표현이 글로벌 비즈니스에서는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필자가 부사장이었을 때 일이다. 한국인 영업 담당 임원이 외국인 사장으로부터 실적 부진에 대해 지적을 받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한국인이라면 그냥 마무리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 사장은 “여기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라며 그 임원의 답변에 대해 오해를 한 적이 있었다. 그는 영업 담당 임원에게 부진을 만회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대응책을 듣고 싶었던 것이지 임기응변 식의 변명을 원했던 게 아니었다.

최근 입사한 직원들을 보면 대부분 매우 높은 TOEIC 점수를 보유하고 있고 외국인과의 대화도 자유롭다. 필자 세대가 외국인만 만나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던 시절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다.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업무 관련 표현을 숙지하고 정확한 의사소통에 주력하는 영어를 구사한다면 글로벌 비즈니스에서 더 많은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에 유창한 발음까지 가미된다면 더 이상 바랄 나위가 없겠다.

정문국 < 알리안츠생명 사장 munkuk.cheong@allianzlife.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