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명예와 권력, 돈을 모르고 아티스트로만 살다 간 1세대 모더니스트 유영국 화백(1916~2002)은 구태의연한 일제 시대의 모방 미학을 뛰어넘어 해방 이후 한국 ‘현대미술의 아젠다’를 세운 선구자다. 그가 여든여섯 살의 나이로 한국의 추상화를 흥얼거리며 세상을 떠난 지 10년.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1935년 도쿄문화학원에서 공부하다가 더 자유로운 회화 형식을 찾아 떠돈 그의 예술 세계는 사후에 더욱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갤러리 현대 강남점 1층과 지하 1층에 마련된 ‘한국현대미술의 거장-유영국’전은 사후 10년 만에 시작되는 ‘유영국 바로 세우기’의 팡파르라는 점에서 미술 애호가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지난 18일 개막 이후 수천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국내 미술시장의 ‘블루칩 작가’가 펼쳐놓은 ‘상상력의 보고’가 어떤 것인지 보려는 단체관람 학생들이 많았다. 미술 전공자와 외국인 관광객은 물론 자녀와 함께 전시장을 찾은 가족 관람객도 줄을 이었다.

동양사상을 그림에 담아낸 유 화백은 한국 화단에 추상미술의 씨앗을 뿌린 대가여서인지 전시장 분위기가 사뭇 진지했다.

정주성 삼성물산 상무(52)는 “유 화백의 작품에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이데올로기의 강고한 ‘그물망’을 뚫고 1950년대 한국의 새로운 추상 미학 세계를 개척한 열정이 보인다”며 “색면 추상 이미지들을 작은 화면 속에 정감 있게 그린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우리 정서가 느껴지고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평했다.

미술애호가 김성민 씨(42·서울 강남구 신사동)는 “1930~1950년대 형상을 무너뜨린 ‘절대 추상’을 비롯해 1950~1960년대의 ‘서정 추상’, 1970년대 이후 ‘기하 추상’작업 등 새 영역을 개척한 유 화백의 작품들을 한곳에서 만날 수 있어 좋았다”고 했다.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한창은 씨(52·서울 하왕십리)는 “유 화백은 어린 시절 고향에서 보았던 산과 바다를 차가운 논리와 강렬한 색채로 화폭에 옮기며 일생 동안 다양한 스펙트럼의 추상 어법을 실현한 거장답다”며 “추상미술이라는 서양의 조형논리를 갖고 있으나 근저에는 동양철학의 근본인 자연관이 깔려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관람객들의 발길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은 지하 1층에 전시된 1988년작 ‘워크’ 앞이다. 삼각형과 사각형의 색면을 배치한 이 작품은 어린 시절 고향의 산과 바다를 차가운 논리와 강렬한 색채로 화폭에 옮긴 것이다.

대학생 김청민 씨(24·서울 논현동)는 “이 작품 앞에 서 있으면 추상적 산의 이미지들이 커다란 캔버스를 바탕으로 확장하거나 진동하는 듯하다. 삼각형 색면들을 부유하는 산의 형상으로 병치해 숭고미가 느껴진다”고 말했다.

우리의 산을 차지게 묘사한 1967년작 ‘산’, 산의 이미지를 처음 추상화시킨 1955년작 ‘산’, 자연의 생명력을 화려하게 붓칠한 1965년작 ‘영혼’ 앞에도 관람객이 줄을 잇고 있다.

박명자 갤러리 현대 회장은 “끈기 있게 다듬은 색면 작품들은 구체적인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작가의 정열적인 감성을 색깔로 승화해낸 자연”이라며 “출품작은 모두 개인 소장자에게서 빌려온 것으로 한국 미술 거장의 작품을 공유할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유 화백의 수작 60여점으로 꾸민 이 전시는 내달 17일까지 이어진다. 관람료 5000원. (02)519-0800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