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먹고 성장하는 사교육…불황에도 끄떡없는 이유는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dismantle은 분해하다. store up 쌓다·축적하다. enthrall 매혹하다. Appre…"
"야, enthrall은 ‘꼬시다’도 맞는 거지. 매혹하는 게 꼬시는 거잖아."
29일 화요일 오후 3시경 서울 서초동 해커스 어학원 제5별관의 한 강의실. 4~6명씩 한 조를 이룬 토플(TOEFL) 스터디 그룹이 그날 외워야 할 단어들로 시험을 본 뒤 채점하고 있었다. 이들은 보통 하루에 100개 이상의 영어 단어를 외운다. 스터디를 처음 구성한 주에 각자 벌금 1만 원씩을 미리 걷었다. 매일 단어 시험을 봐서 10개 이상 틀리면 그 때부터 단어 한 개당 100원의 벌금을 물린다. 다들 영어권 대학으로의 교환학생 혹은 유학이라는 분명한 목표가 있어 스터디 분위기는 진지하다. 때때로 스터디원끼리 너무 친해지면 면학 분위기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한 달간의 스터디가 끝날 때까지 서로 존칭을 붙이는 경우도 있다.
학기 중임에도 불구하고 5별관의 각 강의실에는 스터디를 진행하는 그룹이 3, 4팀씩 있었다. 50석 이상의 자습실도 절반 이상이 차 있었다.
이날 오후 4시에는 6, 7, 8월 이 학원의 토익·토플 수업 등록을 희망하는 사람들의 ‘반 배치고사’가 있었다. 이 시험 성적에 따라 사람들은 자신의 실력에 맞는 학원 수업을 듣게 된다. 제 1별관에서 진행된 토익 반배치 고사에는 약 30명가량이 응시했다. 올해 대학을 입학한 신입생부터 회사의 부장급으로 보이는 머리가 성한 중년 남성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다. 이 학원의 반 배치고사는 개강 첫주를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 진행된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유학을 준비하기 위해 토플 학원에 등록했다는 정모 씨(25)는 “아무리 경기가 안 좋아도 불안감 때문에 학원비는 줄이기 힘들다”며 “토플의 경우 한 번 시험을 보는 데 20만원 가까이 들어 경제적으로 부담이 된다”고 말했다. 대기업 입사를 준비하는 대부분의 지원자들이 교환학생이나 어학연수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제 이런 준비는 자신의 스펙을 ‘특별’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평범’하게 만들기 위한 필수 코스가 됐다.
학원가는 불황을 잘 타지 않는다. 학부모와 수강생의 ‘불안’을 먹고 성장하는 산업이기 때문이다. 사교육을 시키지 않으면 다른 아이 혹은 경쟁에서 뒤처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교육 시장은 경기와 상관없이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실제로 최근 한 영어교육업체가 전국 학부모 5백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학부모 10명 중 7명은 이런 ‘사교육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통계청이 지난 18일 발표한 1분기 가계동향을 살펴보면 가계는 소득이 늘어난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출을 더 많이 줄인 것으로 나타났다. 전년과 비교해 물가 인상률을 제외한 가구당 실질 소득은 3.8% 늘어난 반면, 가구당 월평균 소비지출액의 실질 증가율은 2.2%에 그쳤다. 불황 장기화에 가계가 스스로 대비하면서 지출 증가 속도를 소득 증가속도에 비해 늦추고 있다는 뜻이다.
가구당 월평균 교육비의 경우 36만4000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0.2% 감소한 것으로 집계됐다. 하지만 이는 대학등록금 인하로 정규교육비가 1.4% 줄어든 탓이다. 학원·보습비는 불황속에도 1.8% 증가했다.
사교육에 의존하는 것은 수험생뿐만이 아니다. 스펙을 쌓기 위한 대학생은 물론 승진을 위해 학원을 찾는 직장인도 늘고 있다. 심지어 사법고시나 행정고시 등 고등고시 패스를 위해서도 학원은 선택이 아닌 필수로 여겨지고 있다.
서울대 경영학과를 휴학하고 2년간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는 김 모(27)씨는 현재 사법고시 학원을 다니고 있다. 김 씨는 일요일을 제외 하고 매일 오전 7시부터 8시까지 기상 특강을, 그 후 8시40분부터 12시40분까지 형법 강의를 듣는다.
소위 말하는 명문대 재학생임에도 학원에 다니는 현실에 대해 그는 “수험생으로서 답답함과 무력감을 종종 느끼고 있고 이제는 스스로 무언가를 찾아서 공부하는 습관이 희미해진 것 같다”며 “공부란 스스로 깨우치고 궁금증이 생기고 그를 해소하는 과정이 아니었나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원을 그만 다닐 생각이 없다는 김씨는 “합격을 위한 가장 안전한 방법이 학원이라고 알려져 있고 나 또한 그 사실에 동의 한다”며 “실제로 합격자 중에 학원 강의를 듣지 않은 사람을 보지 못했고 수많은 합격 수기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에 책 제목이기도 한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같은 담론이 나오고 인기를 끄는 이유에 대해 “요즘 젊은 세대가 느끼는 압박감이나 사회적 진입 장벽에 대해 기성세대가 청춘의 고통에 공감하기 시작한 좋은 징조”라며 “하지만 청춘의 아픔에 대한 공감이 공감에 그치고 현실적인 대안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청춘들은 결국 ‘이거 놀리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한경닷컴 이환주 인턴기자 hwlee@hankyung.com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open@hankyung.com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