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국가부도에 직면한 한국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구걸했던 치욕의 날이 1997년 11월21일이다. 하지만 그해 1월 한보그룹 부도로 파국의 방아쇠는 이미 당겨졌었다. 이어 진로와 해태, 기아까지 무너지면서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데도, 당시 김영삼 정부 강경식 경제팀은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은 튼튼하다”고 했다.

물론 사태의 심각성을 알았던들 곧이 곧대로 실토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정부 책임자의 위기 언급이 네트워크를 타고 자극적으로 증폭될 경우 경제안보,국민 삶의 안위에 어떤 파탄적 결과를 가져올지 뻔하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비상상황에서 다급하게 취했어야 할 조치마저 방기(放棄)한 책임까지 벗을 수는 없다.

그 대가는 너무나 큰 고통이었다. 이후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우리가 익히 경험한 바다. IMF의 가혹한 구조조정 요구로 벼랑에 내몰린 금융회사와 기업·가계의 파산으로 얼마나 많은 실업자와 노숙자가 생겨났고 고금리·고물가에 민생이 얼마나 깊은 상처를 입었는지. 아직 그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 우리 경제에 닥친 위기는 그래서 예사롭지 않다. 실물·금융·자본시장 모두 엉망이고, 모든 경제지표가 비틀거리는 모습인데도 제대로 된 경고음이 들리지 않는다. 정부 당국자들이 튼튼한 펀더멘털을 말하는 것도 예전과 마찬가지다. 위기대응 시나리오를 강조하지만 지금 다급한 것은 시나리오가 아닌 액션이다.

당장은 유로존 위기로 인한 충격이 발등의 불이다. 국가부도 위기가 그리스에 이어 스페인 이탈리아로 전염돼 최악의 국면으로 진전될 가능성은 여전하다. 금융·자본시장의 패닉은 말할 것도 없고 실물경제 추락세가 완연하다. 지난 3, 4월 생산과 소비·투자·수출 등 핵심 경제지표가 모두 내리막이다.

게다가 경기에 대한 착시(錯視)가 판단의 오류를 불러오면서 정책은 실종됐다. 잘나가는 삼성전자와 현대·기아차에 의해 한국 산업의 심각한 위기가 가려지고 있는 양상이다. 하지만 이들 전·차(電·車)를 제외한 철강·조선·화학 등 주력산업 모두 성한 곳 없이 깊이 곪아들었고, 고용효과가 가장 큰 건설산업은 아예 빈사 지경이다.

무엇보다 우리 내부 요인으로 인해 경제성장의 맥박이 급속히 떨어지고, 그것이 구조화되면서 악순환의 덫에 갇히고 있는 것이 위기의 본질이라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우리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이미 2000년 이후 4.5% 수준으로 가라앉았고, 의욕적으로 7%를 내걸었던 이명박 정부의 성적표는 더 초라하다. 정권 출범 첫해인 2008년 2.3%, 2009년 0.3%로 곤두박질쳤다. 그 기저효과에 2010년 6.2%로 반짝했지만 지난해 다시 3.8%로 내려 앉았다. 올해는 잘해야 3.5%(한국은행)이고,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전망은 그보다 더 낮은 3.3%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로존 사태가 경기후퇴의 상수(常數) 요인이 된 지 오래이고 보면 그걸 핑계삼는 것은 무책임하다. 지나친 재정 적자와 외채로 파탄에 이른 PIIGS(포르투갈, 이탈리아, 아일랜드, 그리스,스페인) 위기는 이미 5년 전인 2007년에 불거졌었고, 앞으로도 최소한 몇 년 동안 경기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아무도 성장을 말하지 않는다. 정부나 정치권은 잠재성장률마저 밑도는 이 같은 저성장과 장기침체를 당연시한다. 성장 패러다임의 실종이다. 즐비한 대선주자들은 한결같이 우리 경제 최대 현안인 일자리 창출을 내세우지만 진정성이 보이지 않고 신뢰성도 없다. 그 전제인 일자리 중심의 성장을 어떻게 이뤄낼지 구체적인 전략과 비전을 건너 뛰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성장이 고용을 늘리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고 우리 경제의 ‘고용없는 성장’구조가 갖는 한계는 물론 있다. 그럼에도 성장만이 일자리의 단 하나 해법이다. 성장이 없으면 고용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성장부터 말하지 않는다면 복지 또한 거짓이다. 더 이상 성장의 동기부여가 안 되는 성장론의 망각이 가져올 결과는 투자와 생산, 소득, 소비, 일자리가 모두 쪼그라들고 민생이 궁핍해지는 ‘추락경제’일 뿐이다. 이것이 진짜 위기의 실체다. 비상벨은 이미 울렸다.

추창근 기획심의실장 /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