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지난 7일 베를린에 있는 지멘스 공장을 방문했다. 정부의 권유에 따라 원전사업을 포기하고 신재생에너지 분야에 집중키로 한 지멘스 직원들을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여느 기업 최고경영자(CEO) 같으면 국가 지도자의 회사 방문을 언론의 주목을 받는 자리로 적극 활용했겠지만, 페터 뢰셔 지멘스 사장(55)은 달랐다. 총리를 수행하면서 공장 안내를 맡은 30대 직원과 잠시 악수를 나눴을 뿐, 이후엔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브리핑 내용을 경청하기만 했다.

이 조용하고 소극적인 사장의 별명은 뜻밖에도 ‘에너지정책 전환의 투사’(한델스블라트), ‘지멘스를 확 뜯어고친 아웃사이더’(슈피겔), ‘칼잡이’(마켓워치) 등이었다. 지멘스의 사업구조를 전면적으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뢰셔 CEO가 내린 공격적 결정에 대한 시장의 평가다.


○구원투수’, 대수술을 집도하다

뢰셔는 오스트리아 출신이다. 독일 대표기업 지멘스 160년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수장이다. 오스트리아 빈 대학을 졸업했고 홍콩 중문대와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에서 공부했다. 독일 화학업체 훽스트와 일본 의약품 제조업체 아벤티스파마, 제너럴일렉트릭(GE), 머크 등을 거쳤다. 영어, 일본어 등 6개국어를 구사하는 뢰셔는 베트남과 일본, 미국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국제 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독일 시장에선 거의 무명에 가까웠다.

2007년 창사 이래 최대의 위기에 빠진 지멘스는 뢰셔를 CEO로 영입했다. 당시 지멘스는 해외에서 뇌물을 뿌린 사실이 알려져 논란에 휩싸여 있었다. 비자금을 조성, 나이지리아 리비아 러시아 등지로 반출한 것. 통신 관련 계약을 따내기 위해 해당 국가 정책 담당자에게 뇌물을 제공한 사실도 발각됐다. 미국에서도 불법 로비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비자금 규모만 4억6000만유로(6200억원)를 넘었다. 관련 벌금과 추징세금, 소송비용 등을 합친 지멘스의 부담은 15억유로(2조원)에 달했다. 기업 신뢰도는 추락했다. 다른 기업과의 제휴나 계약이 잇달아 연기되는 사태가 이어졌다.

지멘스 이사회는 제약회사 머크의 글로벌 헬스사업 부문 사장으로 경영능력을 인정받은 뢰셔를 CEO로 택했다. 경영능력뿐 아니라 강직한 성품도 발탁 배경이었다. 지멘스는 만연한 순혈주의 문화가 부패를 키웠다고 판단, 외부 인재로 난국 타개를 시도한 것이다. 무명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던 만큼 구조조정 등을 할 때 부담이 적으리란 점도 발탁 배경이 됐다.

당시 독일 주간 슈피겔은 지멘스 CEO에 대해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자리”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실제도 그랬다. 처음에는 통신부문에만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부패는 이미 여러 사업부문으로 퍼져 있었다.

취임 직후 그는 100일간 직원들과 대화하는 ‘리스닝 투어(listening tour)’를 가졌다. 그리고 비자금 스캔들을 진화하기 위해 내놓은 처방은 환부를 도려내는 대대적인 수술이었다. 뢰셔는 “기업 구조와 문화를 통째로 바꾸겠다”며 비리와 관련 있는 임원 500여명을 징계했다. 이 중 130여명은 해고했다. 뇌물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계약을 따낸 직원의 행위를 묵인하는 문화도 없애기 시작했다. 2008년까지 통신사업 부문 인력 40%를 줄이는 등 모두 1만7000명을 구조조정했다.

지멘스의 매출은 2006년 668억유로에서 2008년 773억유로로 늘었다. 같은 기간 순이익도 50억유로에서 93억유로로 증가했다. 체질 개선에 성공한 덕분이었다. 이후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럽 재정위기로 악화된 시장환경에도 불구하고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1·2위 사업이 아니면 과감히 정리하라”

지멘스는 ‘유럽의 GE’라고 불린다. GE처럼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뢰셔가 CEO에 오른 뒤에도 외형상으론 변화가 없었다. 건설과 인텔리전트 빌딩, 보안, 조명, 정보통신, 보수·유지, 헬스케어, 컨설팅 등 다양하다.

하지만 단순히 여러 분야에 걸친 포트폴리오를 갖고 있는 게 아니다. 글로벌 메가트렌드를 읽고 그 트렌드에 따라 유망 사업 포트폴리오를 정한 뒤 그중 1, 2위를 차지할 수 있는 사업에만 집중한다. 현재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외부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포트폴리오도 바꿔나간다.

뢰셔는 취임 이후 복잡했던 사업부문을 정보기술(IT)산업, 에너지, 헬스케어 등 3개 부문으로 단순화했다. 그러고는 인구통계나 기후변화 같은 거대 트렌드 분석을 통해 성장 전망이 좋은 시장을 가려낸 뒤 1~2위 분야에 집중하는 전략을 썼다. 대신 휴대폰, 반도체, 원자력 등 수익성이 떨어지는 부문은 과감히 포기했다.

이 같은 뢰셔의 전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자동차부품 자회사인 VDO를 160억달러에 팔고,미국의 의료스캐너업체 데이드베링홀딩스를 70억달러에 인수한 것이다. 가전부문에서 철수하는 대신 에너지 교통 의료 등 인프라 사업에 집중한 것. 풍력터빈도 해상용에 집중, 세계 해상 풍력터빈 시장 점유율을 5% 수준에서 50%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핵심 사업이 아닌 경우 사업부를 분사하거나 별도의 법인으로 상장시켜 다른 기업과의 제휴도 쉽게 만들었다.

현재 지멘스가 주목하는 메가트렌드는 ‘친환경’과 ‘아시아’다. 기후 변화에 따라 환경기술이 21세기 최고 산업으로 부상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 글로벌 경제성장의 50%가 전세계 600대 도시에서 이뤄지고 있고 앞으로 25년간 주요 도시인프라 건설에 27조유로가 투입된다는 점에 주목, 도시인프라 사업 부문도 대폭 강화했다.

‘그린 시티 인덱스’도 이런 전략의 일환이다. 아시아 22개 도시를 대상으로 에너지 사용과 온실가스 방출, 교통, 쓰레기 처리, 대기질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등급을 매기는 작업이다. 이 과정에서 사업기회를 찾겠다는 얘기다. 지멘스는 전체 매출 가운데 4분의 1을 친환경 기술 분야에서 내고 있다. 해상풍력사업과 고속철도, LED(발광다이오드), 스마트그리드, 전력저장 시스템 등에 집중한 결과다.

○“뢰셔 2기, 1000억유로 기업으로 키워라”

뢰셔는 오는 7월 5년 임기 CEO직을 연임할 예정이다. 독일 경제일간 한델스블라트는 “단순히 ‘녹색경제의 챔피언’ 정도 결과물로 뢰셔가 만족하지 않을 것”이라며 “뢰셔 2기 동안에 매출을 1000억유로(147조원) 규모로 키우는 것을 목표로 삼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와 관련, 뢰셔는 “지멘스가 별탈없이 잘나가고 있다는 것에는 만족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강력한 성장 드라이브를 걸 것임을 시사한 것이다.

매출 1000억유로 달성을 위한 청사진도 제시했다. 독일 일본 등의 탈(脫)원자력 분위기를 활용해 연간 200억유로에 이를 것으로 보이는 신재생에너지 시장을 선점한다는 것이다. 내부적으로는 새로운 시장변화에 보다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남성 중심 이사진과 임원진도 대폭 개편해 여성 임원과 외국인 임원 비중을 크게 높이기도 했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